[이유진의 바디올로지] 우리도 언젠가 모두 먹히고 말 거야
드라마 ‘킹덤’에서 노쇠한 왕은 생사초를 먹고 좀비가 된다. 죽음이 유예된 왕은 끝없이 인육을 갈구한다. 궁 밖은 굶주림으로 아비규환이다. 보다 못한 사냥꾼 영신(김성규)이 왕에게 물려 죽은 이 주검으로 국을 끓여 나눠주자 사실을 알아챈 서비(배두나)가 따진다. 어찌 동료의 주검으로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그러자 영신은 싸늘하게 말한다. “죽은 후에는 그저 고기일 뿐이지.” 국을 먹고 난 백성은 좀비 떼가 되고 만다. 인간인지 비인간인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세상은 지옥, 아수라장을 이룬다.
실제로 조선시대엔 백성이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양반 오희문이 쓴 임진왜란·정유재란 피란일기인 ‘쇄미록’은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혼자 길 가는 사람을 산짐승처럼 포획해 먹은 일이 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숙종 22년에도 굶주린 백성이 인육을 먹었고 선조 9년에는 인육과 사람 쓸개를 치료약으로 쓰는 무리가 있다며 현상금을 걸었다. 익산에는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병 든 아버지에게 삶아 먹였다는 효자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의 살점을 먹는 데는 치유적인 성격도 있었다.
곤충과 물고기는 종족을 잡아먹는 ‘동족포식’을 한다. 인간의 식인은 표류나 조난 상황일지라도 윤리적 논란이 된다. 식인문화를 일컫는 ‘카니발리즘’에 관한 서구의 증언은 16세기 처음 나타난다. 1519년 멕시코에 도착한 에르난 코르테스와 부하들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온 ‘인간 백정’들인데, 아즈테카 왕국을 정복하면서 이곳 제의에서 인신공양과 식인 풍습이 있다고 서방세계에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마빈 해리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인류학자들은 카니발리즘이 실제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한 문화인지 오래 탐구했다. 인류학자들이 구술을 바탕으로 한 연구를 보면, 뉴기니 선주민들은 고인의 주검을 먹으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했다. 이 부족원 상당수가 쿠루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인의 살과 뇌를 익혀 먹는 과정에서 병원균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보제공자들이 식인 풍습을 전해주었을 때 그 풍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실제 식인 풍습이 서구인들에게 직접 목격된 적은 없다. 식인이 상상 속의 문화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풍습이 ‘원시인’ 사회에서 일반적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겁박하는 식인종 이야기에서 보듯, 카니발리즘은 공포를 자극하여 유색인종을 타자화하도록 했다. 중요한 건 근대 부르주아 철학의 주체는 더럽고 두렵고 전염성이 있는 것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이원론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이원론 속에서 식인종과 문명인은 분리되었고 주체인 ‘우리’의 살점은 고기가 되어선 안 되었다.
반면 고기로 환원되는 존재는 적과 타자들이었다. 카니발리즘에는 지배와 착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드라마 ‘킹덤’ 속 백성은 죽을 만큼 굶주려 동족의 살점을 먹고 좀비가 되었고, 전란에서는 ‘좀비 군사’로 동원되어 초과근무에 시달리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적의 살점을 물어뜯으면서 나라를 구한다. 백성은 철저히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버려지는 존재다. 좀비들이 식민주의와 국민국가 조직에 희생된 사람들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영화와 드라마 좀비물에서 흔히 쓰이는 문법이다.
동화나 신화 속에서는 약자인 아이들이 희생되는 카니발리즘이 엿보인다 . ‘빨간 모자’의 늑대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여자아이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원전에서 계모는 며느리와 손주들을 잡아먹으려다가 그 자신이 수프가 된다. ‘헨젤과 그레텔’의 눈 나쁜 마녀는 헨젤이 충분히 먹을 만큼 살쪘는지 손으로 더듬어본다. 그림 형제의 ‘주피터 나무’에서도 계모가 의붓아들을 살해하고 요리해 식사를 차리는데, 아빠는 그게 아들인 줄 모르고 먹는다. 아이를 궁지에 빠뜨려 잡아먹는 사람은 주로 여자들이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16~17세기 여성이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입지를 상실하고 야만족에 부과된 적대와 소외를 한몸에 받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의 육신이 살과 뼈로 이루어져 누군가에게 먹힐 수 있고,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관념은 예술과 철학 영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울하고 끔찍한 그림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태생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늘 자신이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지 반문했다. 베이컨은 어려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았으나 폭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고통당했고 일생을 통틀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 갈빗대 사이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상체 사진을 찍고, 소 갈빗대 사이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고기가 사람인지, 사람이 고기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라고 그는 말했다. 십자가 책형을 다룬 그림에서 베이컨은 그리스도를 고깃덩어리로 비유해 충격을 던졌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처럼, 인간 문화에서 고인을 동일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타인을 먹는 것이었다. 가톨릭 미사는 제사인 동시에 예수의 살을 나누어 먹는 의례를 거행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한 6:56-57)고 예수는 설명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살을 먹으며 고통을 받아들인다. 예수의 몸을 자기 안에 넣는 것은 공동체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인류 공동체는 약자를 억압하고 희생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는 데 열성을 쏟았다. 여러 철학자, 사회운동가들은 장애인과 여성 등 타자화된 존재가 동물처럼 혐오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여러 등급으로 서열화, 위계화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수한 유전자만을 보존하려는 우생학은 동물 육종에서 비롯했다. 1930년대 우생학이 발달한 미국에선 정신장애인들을 대상으로 강제불임수술을 하는 단종법을 통과시켰고 나치 독일은 장애인을 단종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대규모 축산, 도살을 ‘동물 홀로코스트’에 비유하는 논리에 유럽인들 다수가 경악한다. 어떻게 사람을, 희생자를 고기에 비유하느냐는 말이다.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채식주의자 캐럴 애덤스는 ‘육식의 성정치’, ‘인간도 짐승도 아닌’에서 종차별과 성차별을 동일 선상에 놓고 혐오와 차별의 육식 문화를 고발한다. 서구 철학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인간(남성)과 비인간 동물 사이에 있으며 유색인 여성은 더욱이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동물 억압은 인종주의나 여성 억압과 긴밀히 연관되고 육식을 지지하는 문화담론은 가부장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조금 결이 다른 생각을 가진 생태적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생태학자 발 플럼우드는 1985년 카누를 타다가 악어의 공격을 받고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세번이나 겪은 뒤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에서 한순간에 먹이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인간이 고기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오만하며 타자를 도구화한다고 말했다. 또한 애덤스 같은 완전 채식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적 근대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육식 동물의 육식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간의 육식을 문화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생각 자체가 이원론이라는 얘기다. 다른 존재를 존중하며 먹고 먹히는 것이야말로 생태적 관점이라는 견해를 플럼우드는 지지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일찍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고 선포했다. 생체 이식이나 뇌물질 등 타인의 신체 일부를 자기 몸에 이식하는 것은 치유적인 식인 풍습 범주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사람 태반 추출물로 만드는 인태반 주사는 이제 일반적인 갱년기 치료제로 널리 쓰인다.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 시대, 아무도 남을 챙겨주지 않는 각자도생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류는 타인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늙음과 죽음을 유예하고자 타인의 신체 일부를 자기 신체에 투여한다. (사실 그렇게라도 해야 늙은 몸뚱이로 남들만큼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현실이다.)
아무리 연기해도 죽음은 당도한다. 인간이 비인간 동식물과 친족이라고 굳게 믿은 플럼우드는 뇌졸중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동식물에게 먹힘으로써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그는 믿었다. 우리는 모두 결국 누군가의 먹이가 될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잔혹한 진실로써 이 가을, 작은 깨달음을 준다.
이유진ㅣ한겨레21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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