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상상력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소설"

구은서 2023. 10. 3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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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최초 英 대거상 수상자
윤고은 신작 <불타는 작품>
개가 이끄는 예술재단의 지원 조건
"개가 고른 작품 하나는 태운다"
파격적 설정으로 호기심 자극
출간 전부터 영미권에 수출 계약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 대거상을 받은 작가 윤고은. 은행나무 제공


‘(그랜드) 캐니언의 프러포즈’란 제목이 붙은 한 장의 사진은 한때 사랑의 징표였다. 곧 실종사건의 증거물이 됐지만.

사진에는 새벽녘 그랜드 캐니언에서 어느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한 사진작가가 사슴을 촬영하려다 우연히 찍었다. 이 사진은 곧 SNS에서 화제가 됐고, 뜻밖에도 사진 속 여자가 실종 상태란 사실이 밝혀진다. 며칠 뒤 여자는 시체로 발견된다. 졸지에 살인사건 목격자가 된 사진작가는 “스마트폰을 눌러 사진을 찍은 건 내가 아니라 근처를 떠돌던 개 ‘로버트’였다”고 털어놓는다.

이후 ‘사진 찍는 개’로 유명해진 로버트는 “우리 딸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줬다”는 이유로 죽은 여자의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돈을 물려받는다. 로버트를 위해 신진 미술작가 등을 육성하는 예술재단을 설립한 것. 사람들은 ‘개의 생각을 읽는 장치’로 로버트의 뜻을 파악한 뒤 그대로 실행한다. 그게 진짜 로버트의 생각이었는지, 로버트의 이름을 빌려 자기들 뜻대로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배달 앱 라이더로 일하던 한국 미술작가 ‘안이지’는 이 재단의 창작지원 프로그램에 초대받는다. 재단은 융숭한 대접을 하며 대규모 전시까지 약속한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완성 작품 중 하나를 전시회 마지막 날에 불태워야 한다는 것. 화제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다. 이때 어떤 작품을 불태울지는 로버트가 정한다.

소설가 윤고은의 신작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의 도입부다. 340쪽짜리 책의 맨 앞 50쪽 분량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토록 기상천외하다. 추리소설이나 SF소설도 아닌데 한 페이지 뒤를 예측할 수가 없다. “독자의 상상력 빈곤을 자책하게 만드는 기묘한 설정”(김상욱 물리학자)이란 평이 나올 만하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거의 1년 전부터 ‘2023년 주요 출간작’으로 이 작품을 꼽았다.

윤 작가는 2003년 대산대학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후 이효석문학상, 김용익소설문학상 등을 받았다. 2021년에는 <밤의 여행자들>로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의 유명 추리문학상인 대거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일찌감치 그의 진가를 알아봤다. <불타는 작품>은 국내 출간 전 영미권 수출 계약을 맺었고, 스크라이브 출판사에서 출간이 확정됐다.

그저 흥미진진하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계 곤란에 처한 미술작가, 그를 후원하는 거대 예술재단, 예술품 소각에 대한 논쟁 등을 통해 ‘예술을 예술로 만드는 건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소설 속에서 Q 도시의 사람들은 주인공이 Q 도시를 미술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아 도시가 살아나기를 기대한다. 그녀가 다녀간 장소 근처 땅을 미리 사들이기도 하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작품 주제가 무엇이냐”고 닦달한다. 창작에 대한 순수한 욕망보다 창작을 해내야만 하는 주변 환경이 그녀로 하여금 작품을 완성하게 한다. 이 작품은 예술일까, 상품일까.

‘불타는 작품’을 둘러싼 딜레마도 독자를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작가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작품을 로버트가 고르면, 작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까. 그렇지 않다. 로버트가 어떤 작품을 뽑든, 그것이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한 인물은 주인공에게 말한다.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정여울 평론가는 이 책 해설에서 “(작품 속 미술작가가) 혹시 태워질지도 모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며 “예술가의 생존에 대한 고민과 그 해결의 과정 자체도 예술의 일부가 아닐까”라고 썼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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