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서민금융 확대” 발언에 금융사 출연금·상생금융 확대 가능성···“가계부채 축소 기조와 배치·복지의 금융화” 비판도
윤석열 대통령이 3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서민금융 공급 확대로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부담을 완화하겠다”고 밝히면서 금융사의 법정출연금 인상과 자발적인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전날에도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고 한다”며 고금리 시대 금융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금리를 인하하면 대출이 증가해 가계부채가 증가한다는 점에서 최근 정부의 가계부채 축소 기조와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복지로 해결해야할 서민지원을 금융으로 할 경우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주부터 서민금융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시작하고 기존 서민금융 상품을 통합하고 지원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실적이 부진했던 햇살론을 통합하고, 지원 대상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는 서민금융 TF와 윤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서민금융상품을 강조하고 금융의 이자장사를 비판하는 발언을 잇달아 한 만큼 금융사의 서민금융상품 부담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가계대출을 취급하는 금융사는 잔액의 0.03%를 정책서민금융 재원으로 부담하고 있다. 서민과 금융생활 지원에 관한 법률(서민금융법)은 0.1% 범위에서 출연요율과 출연대상을 시행령(대통령령)에 위임하고 있다. 정부는 국회 의결이 필요한 법률 개정 없이도 금융사 부담 비율을 높여 정책서민금융을 확대할 수 있다.
금융사가 자체적으로 마련해 발표하는 상생금융 규모가 커질 수도 있다. 금융권은 올 초 은행의 ‘돈잔치’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잇따라 대출 한도 확대·이자 감면 등의 대책을 내놨다. 금융감독원이 집계한 은행권의 상생금융 실적은 올 8월까지 174만명을 대상으로 한 4700억원이 집했됐고 향후 기대효과는 1조1479억원이다.
횡재세 도입 등을 담은 법률의 제·개정도 본격화할 수 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지난해 9월에 대표발의한 법인세법 개정안은 석유사업자(정유사)와 은행의 초과이득에 50%의 법인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4월 대표발의한 서민금융법 개정안은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연간 1%포인트 이상 상승하고, 그해 은행의 이자순수익이 5년 평균치의 120%를 초과하면 초과분의 10%를 정책서민금융상품 재원으로 출연하게 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의원 발의 법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다는 게 공식 입장이지만 대통령실이나 여당 기류가 바뀌면 서민금융 확대 방안의 수단으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 29일 고위 당정대 협의회에서 “심의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힌 개인금융채권의 관리 및 개인금융채무자의 보호에 관한 법률(개인금융채무자보호법) 제정도 가시화할 수 있다. 개인금융채무자보호법은 채무자의 채무조정 요청권을 신설하고 연체 기간에 채무금액 누적을 제한하는 등 채무자의 권익을 강화했다. 정부 발의 제정안이 지난해 12월 제출돼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법정최고금리 상향도 다시 추진될 수 있다. 연 20%로 고정된 법정최고금리를 시장 상황에 따라 바뀌도록 해서 제2금융권 등이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계속 다룰 수 있게 유도하는 방안이다. 법정최고 금리를 연 20%로 묶자 제2금융권이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줄여 저신용자들이 오히려 불법사금융으로 밀려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는 시행령(대통령령) 개정 사항이다. 금융위가 지난해 말 추진했으나 저신용자의 이자부담이 커질 수 있어 대통령실과 여당이 반대해 중단했다.
전문가들은 서민금융을 확대한다며 금리 인하가 추진되면 가계부채가 증가 폭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문재인 정부에서 폭증했다가 지난해 말에 전년 대비 8조7000억원 줄며 2015년 통계 집계 이래 처음으로 감소했다. 올해는 1분기까지 감소세가 이어졌지만 2분기부터 증가세로 전환해 연말 잔액 기준으로 2년 연속 감소세를 기록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김대기 대통령실장은 지난 29일 “가계부채는 잘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라며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하면 1997년 기업 부채로 겪었던 외환위기의 몇십 배 위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이자율을 낮추고 대출을 줄이는 방법은 지구상에 없다”면서 “특정 은행이 특판 상품이라도 내놓으면 정말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 차주가 이용하게 되고 결국 대출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도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을 돕는다면 대출이 아닌 지원금 등 복지 정책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이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각종 제도를 운용하고 있고 은행권 경쟁 유도 방안을 발표한 지 4개월도 되지 않았다는 점도 부담이다.
금융위는 지난해부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저금리 자금 공급(대출), 대환대출, 새출발기금 등을 시행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은행권 경영·영업 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한 후 지난 7월 대구은행의 시중은행 전환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서는 금융권이 사실상 올해 내내 정치권의 압박을 받는 데에는 고금리 상황에서 대출과 이자장사로 역대급 수익을 경신하면서도 사회공헌에는 소극적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은행연합회가 지난 30일 발간한 ‘2022 은행 사회공헌활동 보고서’를 보면 은행권은 지난해 사회공헌에 1조2380억원을 투입했다. 전년보다 1763억원(16.6%) 증가했지만 당기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6.9%에서 지난해 6.5%로 0.4%포인트 낮아졌다.
유희곤 기자 hul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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