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독점 깬 각국 사법부···‘성별’ 장벽 넘어 소수자도 들어왔다[이토록 XY한 대법원]
‘미국 최후의 인종 장벽이 깨졌다.’
지난해 6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연방대법원 233년 역사상 최초로 흑인이자 여성인 커탄지 브라운 잭슨을 대법관에 지명한 것을 두고 미국 언론이 한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대법관이 모두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취임한 지 1년 반 만에 흑인 여성 대법관을 지명했다. 백인 남성 위주로 쌓아올려진 미국 대법원의 ‘강철 장벽’이 부서진 순간이었다.
잭슨 대법관의 인준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공화당 쪽에선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법관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잭슨 대법관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법관 서기, 양형위원회·연방 항소법원 근무 등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인물이었다. 취임 1년이 넘은 현재 미국 언론은 잭슨 대법관에 대해 ‘과감하고 독립적’이라고 평가한다.
전세계 각국은 ‘여성 대법관’의 장벽을 이미 뛰어넘었다. 최고법원을 구성하는 데 단순히 성별 비율만 따지지 않는다. 다양한 가치관은 물론이고 인종과 성적 지향 등을 지닌 소수자 대법관이 배치되고 있다. 법관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외국 법원들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는지 살펴봤다.
성별 너머 논의로 넘어간 각국 최고법원들
미국이 처음부터 대법관 다양화의 선발주자는 아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 최초의 여성 대법관(샌드라 데이 오코너)은 1981년에 나왔지만, 그가 2006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돌보기 위해 자진 사임하면서 2009년 상반기까지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유일한 여성 대법관으로 재직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변화를 맞았다. 2009년 소니아 소토마요르가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에 올랐고, 그다음 해엔 엘레나 케이건이 50세의 나이에 역대 최연소 대법관이 됐다. 로스쿨 교수·대통령 법률 자문관 등을 거친 케이건은 법관 근무경력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 후 에이미 코니 배럿과 잭슨 대법관이 취임하면서 현재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4명이 여성이다.
세계 헌법재판을 선도하는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도 현재 남녀 비율이 동등하다. 연방헌법재판관 16명 중 절반인 8명이 여성이다. 2015년엔 남성 11명, 여성 5명이었지만 여성 재판관 수가 꾸준히 늘어났다. 재판관으로 선발되기 위해선 40세 이상에 연방의회 의원의 피선거권이 있어야 하고, 독일 법관법에 규정된 법관 자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재직 중인 재판관들의 나이는 1955년생부터 1973년생까지 다양하다. 이같은 정보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부 공개돼 있다. 재판관의 성별, 나이뿐 아니라 이력, 출신 지역, 결혼 여부, 자녀 수 등도 나와 있다.
여성 대법원장을 배출한 나라도 적지 않다. 1990년 첫 여성 대법관이 나온 캐나다는 이후 10년 만에 여성 대법원장을 맞이했다. 2000년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비벌리 맥라클린 전 대법원장은 캐나다 역사상 최장기간(17년) 재직한 대법원장이었다. 캐나다에선 최근 차기 대법관으로 여성 판사인 메리 모로 앨버타주 법원장이 지명되면서 대법관 9명 중 5명이 여성이 될 예정이다. 여성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캐나다 대법원 148년 역사상 처음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뉴질랜드는 2004년 대법원이 창설됐는데, 시안 엘리아스 전 대법원장이 첫 여성 대법원장이자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태국, 멕시코, 케냐 등은 현직 대법원장이 여성이다.
이들 나라에선 최고법원에서 여성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인종·출신 지역·성적 취향 등 성별 외 ‘다양성 지표’를 달성했는지가 주목받는다. 독일에선 2011년 최초의 동성애자 재판관인 주자네 베어, 2020년에는 통일 30년만에 처음으로 옛 동독지역 출신 재판관인 이네스 해르텔이 선출돼 현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캐나다에선 지난해에 역사상 첫 원주민 대법관이 나와 ‘역사적인 대법관 지명’이란 평가를 받았다.
다양성 보장하려는 제도 갖춘 나라도
최고법원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폭넓게 열어 제도적으로 다양한 법관을 확보하는 국가도 있다. 일본에선 변호사 자격 없이도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에 오를 수 있다.
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일본의 최고 사법기관은 최고재판소로,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곳이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총 15명이며 내각이 이들에 대한 선발권을 가진다. 재판소법은 40세 이상의 법률 소양을 가진 자를 뽑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최소 10명만 판사·검사·변호사로 10년 이상 근무하거나 법학교수로 20년 이상 근무한 이들로 채우면 된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법조인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모두 변호사 자격이 있는 이들로만 임명하도록 하는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자유로운 편이다. 관례에 따라 1970년대 이후부터는 판사 6명, 변호사 4명, 검사 2명, 대학교수 1명, 행정공무원 1명, 외교관 1명이 최고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돼왔다. 2021년에는 나가미네 야스마사 전 주한 일본대사가 외교관 몫 재판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영국의 법관 임용절차에선 매우 구체적으로 다양성을 고려하려는 노력이 발견된다. 영국은 2005년부터 ‘법관 인사위원회(Judicial Appointment Commission·JAC)’라는 독립적인 기구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법관을 최종적으로 임명하는 것은 왕이지만, 후보자 추천부터 검증 및 선발까지 전반적으로 법관 임용절차를 주관하는 건 JAC다.
JAC는 매년 집계되는 통계에 기반해 사법부에서 과소대표되고 있는 집단을 뽑을 수 있다. 영국 법무부는 해마다 사법부 내 다양성에 관한 통계를 발표한다. 성별, 나이, 인종, 전문경력 등 지표를 선정해 구성원들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살핀다. 해당 자료에는 구체적인 수치뿐 아니라 통계학자의 ‘평가’도 함께 담긴다. 예컨대 지난 9월 공개된 2023년도 통계에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사법부 내에서 잘 대표되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고위 법관직에서는 과소 대표되는 경향이 있다”는 평가가 담겨있다.
JAC는 후보자들의 능력이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과소대표된 그룹에 해당하는 후보자를 우선 선발할 수 있다. 헌법개혁법 제63조 4항은 법관의 임용이 오로지 능력에 의해 이뤄질 것을 규정하면서도 법관 구성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동등한 능력을 갖춘 후보자들 가운데 특정인을 선택하는 것을 허용한다. 2010년 평등법이 제정된 이후엔 연령, 성별, 장애, 인종, 종교 또는 신념, 성적 지향 등 9가지 기준을 고려해 법관 구성의 다양성을 증진할 의무까지 생겼다.
유엔 “2030년까지 사법부 성비 문제 해결하라”
유엔(UN) 등 국제기구에서도 ‘사법부 내 유리천장’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엔 인권이사회의 법관·변호사의 독립성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2021년 ‘사법행정에서의 여성 참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특별보고관은 해당 보고서에서 사법부와 검찰 시스템 내 성평등 보장은 인권 실현·민주주의 강화·젠더 기반 폭력 근절로 이어진다면서 사법행정 체제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대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별보고관은 그러면서 법조계에 입문하거나 승진하기 위한 요건에 유리천장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회원국들에 각국의 법적·제도적·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여성의 요직 진출을 방해하는 장벽을 확인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또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SDG)의 일환으로 2030년까지 사법부와 검찰 내 여성 비율을 50%로 확대할 것을 권고했다. 유엔은 2021년 총회 결의로 매년 3월10일을 여성 법관들의 연대를 기념하는 ‘세계 여성 법관의 날’로 지정했다. 1975년 유엔이 3월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지 46년 만이다.
100여개국의 여성 법관들은 세계여성법관회의에 참여해 사법부의 성평등과 다양성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한 판사는 “여성 법관 필요성에 대한 국제적 논의는 결국 여성뿐 아니라 다른 소수 민족이나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법관이 필요하다는 논의까지 필연적으로 나아간다”며 “소수자 법관 비율을 늘리기 위해 여성 법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흐름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또 “국민에게 소수자 출신 법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을 하는 사례도 있다”며 “어린이들에게 여성이나 유색 인종의 법관이 ‘나 같은 소수자도 판사가 됐다’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이토록 XY한 대법원]의 XY는 남성의 성염색체를 말합니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히 대법원은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대법관 다양화와 관련한 더 많은 기사를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로 들어오세요.
링크: https://m.khan.co.kr/series/articles/as378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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