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의전원, '성적'만으로 학생 뽑으면 안 돼...면접 시 공들여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백신부터 비만치료제, 암 치료제 등이 속속 개발되면서 의학과 공학을 융합해 연구하는 '의사과학자' 양성책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한국 의대 졸업생 중 의사과학자는 1% 미만이다. 신찬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MAC) 이사장이 지난 6월 '2023 대한의학회 학술대회'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국내 의사과학자 수는 미국의 55분의 1 수준이다.
의사과학자 양성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과기의전원 설립은 국내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도 있다. 학생들이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 연구 현장이 아닌 병원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개원의가 된다면 설립의 의미가 없다는 우려다.
31일 대전 KAIST 본원 의과학연구센터 하자홀에 열린 '바이오 의료사업 발전을 위한 글로벌 의사과학자 양성 토론회'에 참석한 의사과학자 볼프람 고슬링 미국 하버드 의대 HST(Health Sciences & Technology) 프로그램 디렉터와 김성국 미국 스탠퍼드 의대 교수는 "한국에서의 의과학대 설립은 거대한 실험"이라며 "의사과학자가 되고자하는 동기가 확실한 학생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美 의과학대 교수들 "'의사 혁신가'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 필요… 환자 돌보는 경험도 중요"
고슬링 디렉터는 "(HST에서는) 의사과학자로서의 환자에 대한 책임을 가르친다"며 "실제 환자를 돌보는 능력이 시험 성적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최근 설립 50주년을 맞은 HST는 1970년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가 협약을 맺어 설립했다. 의학은 하버드대에서, 이·공학 분야는 MIT에서 주관한다. 4년제 석사 과정을 거쳐 의사면허(MD)를 취득하고 이후 공학박사 학위를 위한 공부를 지속할지를 선택한다. 고슬링 디렉터에 따르면 5년 차에 접어든 학생의 30~40%는 의사과학자(MD-PhD) 과정을 택했다.
학생들은 1학년 1학기 때 생물의학, 해부학, 병리학 등 여러가지 기본 의학을 배운다. 2학년 2학기부터는 보스턴 내 병원에 투입돼 실제 환경에서 환자와 연구가 어떻게 접목되는지 경험한다. '패스웨이(pathway)'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희귀 질병이나 병명 진단을 내리기 어려운 병을 앓는 환자 옆에 학생을 붙여, 학생이 전문의와 함께 특정 환자를 한 달 동안 지켜보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떤 세포가 질병 발현을 유발하는지 등을 조사해볼 수 있다.
고슬링 디렉터는 "의사과학자 양성에는 '의사면허를 취득하기 전 어떤 커리큘럼을 짤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며 "10~20년 후 공동체를 위한 의사 혁신가가 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국 스탠퍼드 의대 교수가 몸 담고 있는 '스탠퍼드대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MSTP)' 역시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엎고 50년 이상 운영돼 왔다. 2022년~2023년 기준, MSTP 재학생의 18%는 국고에서 충당된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왔다.
MSTP에서 MD-PhD를 취득하는 과정은 평균 7~8년 소요된다. 입학 후 2년 동안은 기초의학 과정을 밟은 뒤 이후 3~4년 간 공학박사 학위 과정을 밟는다. 논문이 통과되면 의사 면허 취득을 위한 임상실습(clerkship) 과정이 시작된다.
김 교수는 MSTP의 의사과학자 양성은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활동과 이해를 동시에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댐에 구멍이 뚫렸을 때 온몸을 던져 구멍으로 쏟아지는 물을 막으려는 유형이 있는가하면 멀리서 지켜보며 전체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유형이 있는데, 의사과학자는 이 두 유형을 융합한 인력이라는 뜻이다.
김하일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HTS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가진 KAIST 과기의전원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며 "공대 박사 과정 학생과 과기의전원 학생이 함께 교육을 받고 전 학년에 공학 및 연구 과정을 배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적만 좋은 학생 뽑으면 100% 실패…학생 선발에 심혈 기울일 것"
의사과학자 양성안을 늘 따라다니는 의문점은 '졸업생이 진짜 의사과학자가 되느냐'다. 이번 토론회에 참석한 한 교수는 "과기의전원이 설립된다해도 학생들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의견이 있다"며 "졸업 후 다시 임상으로 돌아갈테니 처음부터 공학 석사를 취득한 사람만 뽑는 건 어떻냐"고 자격 요건에 대해 건의했다.
고슬링 디렉터는 "HST 입학생을 보면 유럽에서 공학을 공부하다 온 학생도 있고, 학부생 때 의학을 전공하다 온 학생도 있다"며 "의사과학자 훈련 과정에 크게 감명을 받고 이 길에 동참할 후보군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성국 교수는 "스탠퍼드 의대 프로그램의 경우 국가에서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졸업 후 일정한 정도 반드시 연구에 기여하도록 정해져 있다"며 "학생을 선발할 때는 유연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고슬링 디렉터와 김 교수는 학생 선발 및 교육 과정을 통해 '진짜배기'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슬링 디렉터는 "인생에서의 '성공'을 돈으로 정의하는 학생은 이 프로그램에 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년 이상의 긴 시간을 의사과학자가 되는데 투자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경제적 동기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인간 공동체에 기여하고 싶다, 사람의 고통을 줄이고 싶다는 동기가 있는 사람들이 함께 일한다면 엄청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 과정에서 학교가 뜻하던 바와 다른 길을 가는 학생도 있겠지만 끌어안고 가야한다"며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가능하며, 교육 기관은 학생이 가장 영향력있고 좋은 결정을 하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김하일 교수는 학생 선발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학생 선발에 매우 많은 노력과 돈을 투자할 것"이라며 "얼마나 성적이 뛰어나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동기가 있느냐를 중점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적 우수한 학생을 뽑으면 100% 실패했다"며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이 공을 들여 면접을 본다면 이 학생이 진짜 의사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진심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고슬링 디렉터 역시 "HST 지원자 중 여러모로 매우 뛰어난 자격을 가진 학생이 있었는데 불합격 처리했다"며 "(연구 분야와 관련된) 도전적인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면밀히 평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전=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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