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먼저 간 일본 … 의사부족 어떻게 해결했나
정부가 10월 중순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안을 밝히면서 의정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정부를 비롯한 국민 대다수는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는 쪽에 찬성하지만 의료계는 의료수가 개선이나
의료사고 부담 완화, 전공의 근무 환경 개선 등이 선행돼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도
찬반이 갈린다. 병원 경영을 하는 의료인(병원장)은 의대 증원을 찬성하는 편이지만 동네 의원·월급쟁이
의사들은 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병원장들이 주요 회원인 대한병원협회는
찬성, 개인 회원이 많은 대한의사협회는 반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와 의료제도나 환경이 비슷한 일본도 의사 부족과 함께 필수의료 공백이 악화되고 있다. 또 임상 경험이 많은 50·60대 의사들 자체도 고령화로 곧 일선 현장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언론에 소개된 일본의 의료 문제 해법과 함께 국내외 전문가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소개한다.
일본 홋카이도 기타미중앙병원이 지난 9월 말 경영 악화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이유는 만성적인 의사 부족과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환자 감소였다. 내과, 외과, 정형외과 등 7개 진료과가 있던 이 병원은 상근의사 2명과 비상근의사가 하루에 외래 환자 90명을 진료해왔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것이다.
세계 최고령 국가인 일본은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우리나라에 많은 교훈을 준다.
의사 부족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 인구(2022년 기준)는 각각 5140만명, 1억2400만명이다. 현재 활동하는 임상의사는 한국 13만2479명(의사 10만9937명·한의사 2만2542명), 일본 32만7000명이다. 국민 1000명당 의사 수는 한국 2.57명, 일본 2.64명이다.
양국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7명)보다 턱없이 낮다. 우리나라는 한의사를 제외하면 의사 수가 1000명당 2.13명이다. 일본의 의사 부족은 통계상 한국보다 낫지만 상황은 심각하다. 그 이유는 질환 노출이 잦은 초고령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인구 대비 의사 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중증질환 발병이 많은 고령 인구 대비 의사 수가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지난해 기준 29.3%, 75세 이상은 15.7%다. 노인 인구는 계속 늘어나 2040년 65세 이상이 35.3%, 75세 이상이 20.2%에 도달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2025년 65세 이상 인구가 20.6%를 기록해 초고령사회가 된다. 2017년 고령사회에 진입한 후 8년 만이다. 2035년 30.1%로 일본(32.8%)을 바짝 쫓고, 2050년 40.1%로 일본을 역전한다.
일본은 요즘 비상이 걸렸다. 내년 단카이세대(1947~49년 출생)가 모두 중증질환에 노출되기 쉬운 75세를 넘어 의료 수요 폭증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의사가 최근 급증하고 내년 4월부터 의사의 시간 외 근로시간 상한선이 연간 960시간(주 58시간), 특수한 상황일 때는 연간 1860시간(주 75시간)이 적용된다. 주당 40시간 근로가 원칙이지만 의사들이 혹사당한다는 비판 여론을 반영해 근무시간을 제한했다. 주 58시간 이상 일하는 의사는 주로 대학병원이나 응급환자를 수용하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진료과목별로는 응급의학과, 외과계열, 산부인과 등에 집중돼 있다.
우리나라도 전공의 연속근무 시간 상한을 현행 36시간에서 24시간으로 줄이거나 주당 근무시간을 68시간으로 제한하는 전공의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의사가 부족한 일본과 한국 모두 과로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로사를 뜻하는 일본어 '가로시(過勞死·Karoshi)'가 영어사전에 등재돼 있을 정도다.
일본 정부는 1973년 지방 의사를 확충하려고 모든 도도부현(한국의 서울, 부산, 광역시, 각 도)에 의학부(의대)를 두는 구상을 각의에서 결정했지만 일본 의사회 반대로 1982년 이후 억제로 돌아섰다. 1997년에도 각의 결정에 따라 의대 입학 정원이 7625명까지 억제됐다. 지역 격차가 심해지자 일본은 2006년부터 지방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가 그 지역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면 장학금 반환을 면제해주는 '지역 범위'를 확대했다.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2008년 의대 정원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렸지만 초고령인구 증가로 의료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일본 의사 수는 1998~2008년 24만9000명에서 28만7000명으로 15% 늘었다. 이어 2018년 32만7000명으로 14% 증가했다. 그러나 일반외과, 정형외과·뇌외과, 흉부외과 등 외과계 의사 총수는 같은 기간에 각각 5%, 10%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일본은 국토가 길고 지방분권화가 잘돼 있어 쏠림현상이 한국보다 덜한 편이다.
한국은 의약분업(2000년) 파동 때 의정 합의로 2006년 의대 정원을 10%(351명) 감축해 3058명으로 굳어졌다. 2020년 문재인 정부에서 의대 정원을 2022년부터 매년 400명씩 10년간 최대 4000명까지 늘린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의대생과 의료단체의 총파업으로 결국 무산됐다.
일본도 한국처럼 '3분 진료'가 낯설지 않다. 일본은 의사가 10년 전보다 4만명 넘게 늘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근무지나 진료과 편중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도쿄 23구는 최근 10년간 피부·성형외과, 정신과 의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우리나라도 수련 과정이 편하고 고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피안성정재영(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관련 의료기관이 급증했다.
세계에서 가장 늙은 일본은 지금 당장 부족한 의사를 메우기 위해 묘안을 짜내고 있다. 의사 부족과 함께 현역 의사들이 빠르게 고령화되고 의료 환경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도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의료소송 때문이다. 일반 응급이나 소아과, 산부인과 등은 의료소송에 휘말리기 쉬워 해마다 지원자가 줄고 있다. 특히 인구 고령화로 중증 응급 환자가 늘고 있지만 1차 의료기관이 제 구실을 못해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들 진료과 의사들이 사직하거나 전과하는 의사들이 늘고 있어 인력 부족이 한층 악화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상황이 비슷하다.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의료진의 의료사고 대책 마련이 시급함을 방증한다.
여자 의사에 대한 배려도 적극 고려하고 있다. 결혼, 출산, 육아를 하면서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이나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경력이 일시 중단될 가능성이 있다. 최근 수년간 여의사 비율이 커지고 있지만 병원 내 보육시설이 없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병원들이 적극 참고할 만하다. 필요하다면 정부 지원이 요구된다.
의사 증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공급이 늘어나면 수요 창출로 이어져 의료비 부담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지만 진료비는 정부가 가격(수가)을 정하고 있어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사는 적절히 배치되지 않으면 경쟁이 격화되고 불필요한 의료 제공으로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일본은 올해 예산이 114조3812억엔이었는데, 의료비를 중심으로 한 사회보장비가 36조8889억엔에 달했다. 이 때문에 세입은 늘어난 게 없는데 세출이 계속 확대돼 올해 35조6230억엔(전체 예산의 31.1%)이 부족해 신규 국채 발행을 통해 메우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인해 정부 예산의 31%를 빚에 의존한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은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대 정원 확대는 단순히 의사 공급만 늘리는 게 아니라 의료비 지출 증가로 이어질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2025년 베이비붐 첫 세대인 1955년생이 70세에 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향후 20년간 의료비 지출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이 때문에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지금 당장 현역 의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의대에 입학해 환자를 보려면 의대 6년, 수련의, 전공의, 군복부(공보의)까지 감안할 때 약 15년이 걸린다. 2025학년도 신입 의대생이 의료 현장에 투입되는 2040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 중 35.3%에 달할 전망(통계청)이다. 또한 의사가 제몫을 하려면 졸업 후 10년 이상 연한이 필요하다.
따라서 증원된 의대생이 임상 현장에 투입되기 전 의사 부족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에서 운영 중인 '어텐딩 시스템(attending system)' 도입을 적극 검토하자는 의견이 나온다. 이는 의원급에서 근무하는 의사가 다른 병원에 자신의 환자를 입원시키고 해당 병원의 수술실(장비)과 인력 등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소아외과나 응급의학과, 외과, 산부인과 등 기피 진료과목 전문의가 클리닉(1차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다면 주변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 수술실과 장비를 이용해 자신의 환자를 수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필요하다면 정부가 수술실을 만들어 1차 의원 의사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수술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료사고도 큰 하자가 없는 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학·종합병원의 필수의료 진료과목 의사는 현재 소속된 (대학)병원 이외의 의료기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기피진료 사각지대의 병·의원에서 시간 외 진료를 할 경우 수가를 차별화해 지급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다카하시 야스시 일본 국제의료복지대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수술이나 출산 및 응급에 관련된 의사의 일은 힘들지만 대신 급여가 다른 진료과보다 높아진다는 점을 명시해 그 진료과를 희망하는 의사를 늘려야 한다. 이들의 진료수가 일부를 병원을 통해서가 아닌 의사에게 직접 지급하는 '닥터피'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나라는 이미 일부 기피 진료과 의사에게 정부가 직접 지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의사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원격의료와 온라인 진료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이병문 의료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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