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신뢰에요’·‘수특펴라’·‘건행’·‘너 T야?’…유행어 남발,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권나연 2023. 10. 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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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과 문화 반영하는 유행어
SNS·인터넷 시작으로 일상까지
세대차이 유발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일시적 현상 신경 안써
과도한 줄임말은 불편한 시선도

“I am 모범생이에요”, “I am 대박이에요”, “I am 기대치 상회에요”….

‘신뢰’가 최우선인 증권사 보고서에 문법에 맞지 않는 괴상망측한 문장이 등장했다. 대다수는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남현희 전 국가대표 펜싱 선수와 재혼을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사기꾼으로 전락한 ‘자칭 재벌3세’ 전청조의 말투인, 이른바 ‘청조체’다. 심지어 원래 맞춤법은 ‘신뢰예요’지만 이 또한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청조체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일상생활에서는 습관처럼 다양한 유행어가 사용된다. ‘수특펴라(수능특강 교재 펴고 재수 준비하자)’, ‘건행(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너 T냐(너 MBTI에서 T유형 성격이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을 시작으로 번지는 신조어들, 때로는 세대 간 거리를 넓히기도 하는 유행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전청조씨의 말투를 사용한 어느 병원의 입간판. 엑스(X, 옛 트위터)

◆충격에서 관심으로, 그리고 재미로…“I am 신뢰에요”

시작은 충격과 논란의 연속이었다. 남씨가 15세 연하의 재벌3세와 재혼을 앞두고 있다고 발표하면서다. 두 사람의 앞날에 대한 축복이 쏟아지는 동시에, 한쪽에서 작은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전씨가 ‘여자’이며, 재벌3세가 아닌 실형을 받고 교도소에 복역한 적이 있는 ‘사기범’이라는 것이다.

전씨를 향한 증언이 쏟아지면서 의혹은 커졌다.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성별조차 불분명한’ 전씨의 정체로 옮겨갔다. 결국 그는 사기꾼으로 드러났다. 반전의 연속, 상상을 뛰어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이렇게 재미있는 드라마는 처음”, “막장 작가들 반성하라” 등의 반응을 쏟아냈다.

높은 관심을 방증하듯, 전씨가 사기행각을 벌이면서 사용한 ‘청조체’는 빠르게 유행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한 유튜버에게 “Next time(다음)에 놀러 갈게요. Wife(아내)한테 다녀와도 되냐고 물었더니 ok해서 물어봤어요. But you friend(하지만 네 친구)와 같이 있으면 I am(나는) 신뢰에요”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거짓말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적절히 영어를 섞어 사용했지만, 문법에 맞지 않는 엉터리였다. ‘신뢰에요’ 또한 ‘신뢰예요’가 바른 말이다. ‘현금 51조원이 있다’, ‘강의 한번에 3억원씩 번다’는 대단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했다. 여기에 사람들은 재미를 느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거짓말을 하며 “I am 신뢰에요”라고 하는가 하면, “I am 안 속아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한 증권사 보고서에는 ‘2개 분기 연속 흑자 I am 기대해요’라는 제목이 등장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I am PER(주가수익비율) 3배에요. OK… Next Time 주가 반등’이라고 작성했다. 재미있는 제목에 고객들이 더 관심을 갖는 점을 감안해 작성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신뢰와 발음이 비슷한 말을 ‘I am’에 갖다 붙여 사용하기도 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직장인 류모씨는 “남편과 승용차를 타고 가다 중랑구 신내동에 진입했는데, 남편이 갑자기 ‘I am 신내에요’라고 하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의대 정원 늘어난다고?…“대학생들 당장 ‘수특펴라’”

‘수특’은 수능특강 교재의 줄임말로, ‘수특펴라’는 재수를 준비하자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말은 정부가 2025학년도 의과대학 정원을 1000명 이상 늘릴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상위권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의사는 다수가 선망하는 고소득 직업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의사‧한의사‧치과의사의 연평균 소득은 2억6900만원이다. 관련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4년 1억7300만원과 견줘 9600만원이 증가했다.

또다른 고소득 직종인 변호사와 비교하면 수입 증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변호사업 평균소득은 1억200만원에서 1억1500만원으로, 7년간 1300만원 늘어났다.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소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고령화에 따른 의료서비스 수요증가 ▲비수도권과의 불균형 문제 해소 ▲대형병원 의료인력 부족 등을 감안하면 의대 정원을 확대하더라도 의사는 고소득을 유지할 전망이다.

최근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안민석 의원은 “의대에 들어가는 학생 5명 중 4명이 재수생”이라며 “(의대 정원 확대에 따라) 의대 입시 광풍이 더 요란해질 거라는 얘기가 나온다.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 현장, 전문가들이 모여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수특펴라’는 인터넷 방송이나 게임 채팅방 등에서 미성년자들에게 공부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최근에는 많이 사용되지 않다가, 의대 정원 확대 이후 대학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씨가 팬들의 건강과 행복을 응원하는 모습. 유튜브 영상 캡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건행”

상대방의 건강과 행복을 응원하는 이 말은 트로트 가수 임영웅씨가 사용하면서 팬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특히 ‘ㄱ(기역)’자 모양으로 손을 구부리는 자세를 함께 취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는 만큼 임씨의 팬들도 자주 사용한다. 팬들은 임씨의 콘서트나 무대영상, 사진 등을 SNS에 올린 뒤 ‘건행’ 혹은 ‘건행ㄱ’을 해시태그하고 있다. 해시태그는 단어에 ‘#’을 붙여 사용하는데, 이 경우 같은 ‘주제’의 글끼리 모아서 볼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건행’과 비슷한 신조어로는 ‘행쇼’가 있다. ‘행복하십쇼’의 줄임말로, MBC 예능 ‘무한도전’ 특집 무한상사에서 소개돼 널리 알려졌다. 다만 이 말은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사람에게 빈정대는 투로 사용되기도 한다. 현재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추억의 유행어’다.

◆“이걸 공감 못한다니, 너 T야?”

‘너 T야?’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이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눈 ‘MBTI’ 검사에서 비롯됐다. T는 사고(Thinking)를 의미하며, 감정(Feeling)이 풍부한 사람과 대조적인 성격 유형이다.

T유형은 이성적인 사고로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소식을 전했을 때, T유형의 사람들은 “괜찮아, 다친 데 없어?”라는 말 대신 “누구 잘못이야, 보험사에서는 뭐래?”라고 먼저 묻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직장인 안모(36)씨는 “전화로 소식을 알릴 정도면 크게 안다친 건 확인된 건데, 사고해결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때문에 T유형은 상황파악과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공감능력 부족으로 냉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성격유형을 떠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것도 공감 못해?’라는 의미로 “너 T야?”라고 말한다.

직장인 김모(43)씨는 “종종 ‘T야?’라는 말을 듣고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며 “부정적인 의미로 물어보는 건 알겠는데, 맨날 징징대고 투덜대는 걸 다 공감해주다 보면 인생이 피곤해진다”고 말했다.

◆시대를 담은 언어…세대차 유발하기도 하지만 “신경 안써”

사람들은 유행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대다수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말 그대로 일시적인 ‘유행’인 만큼 재미가 사라지면 사라질 것이기에 쓰든 말든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직장인 정모(35)씨는 “‘I am 신뢰에요’를 지금 많이 쓰고 있지만 얼마나 가겠느냐”며 “새로운 사건이 터지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강모(39)씨 역시 “이상한 말들이 금방 유행하다가 식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잘 모르고 신경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기성세대는 ‘유행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세대차를 느끼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박모(60)씨는 “아직 직장에 다니다 보니 젊은 친구들과 밥을 먹거나 회식을 할 때도 있는데, 가끔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지?’ 싶어 물어볼 때가 있다”며 “그럴 때마다 세대차이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들 겪게 될 일 아니겠나”고 반문했다.  

지나친 줄임말은 불편하다는 시선도 있었다. 국어강사 이모(42)씨는 “학생들이 비속어나 줄임말을 정말 많이 쓴다”며 “누군가는 줄임말이 ‘언어의 효율성 측면에서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는데 굳이 줄여서 써야 하나 싶을 때도 많다”고 했다.  

또 ‘전청조체'가 경우 방송·광고까지 접수하며, 이른바 ‘밈(meme·인터넷 유행어)’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다. 한 평론가는 자신의 SNS에 “명백히 사기 피해자들을 양산한 사기꾼이 사기를 위해 쓴 말이라면 적어도 기업과 공공기관에서는 지양해야 하지 않겠나”라며 “허접한 사기꾼에 대한 비웃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허접한 사기에도 속은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연예인과 지방자치단체가 ‘전청조체’를 사용해 대중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누리꾼들은 “사기꾼이 한 말이고, 피해자가 있는 사건인데 신중해야 한다”, “피해자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재미로만 여겨서는 안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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