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통령이어도 돌아간다’는 옛말…눈치 보는 관료들

박찬수 2023. 10. 3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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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11
대통령과 관료③
‘관료의 정치화’ 부추기는 윤 정부의 ‘차관 정치’
윤석열 대통령이 3개 부처 개각을 단행한 9월13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신원식 국방부·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브리핑에 참석하고 있다. 이 중 김행 후보자는 낙마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1960~80년대에 관료들이 뛰어난 성과를 보인 건, 선진국 경험을 벤치마킹할 수 있었던 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후발 국가로서의 장점을 한국 관료들이 잘 활용했던 셈이다.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지금은 그 역할을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해야 한다. ‘그래도 나름 유능한 관료제가 있으니 누가 집권하든 정부는 그럭저럭 굴러갈 것’이란 건 옛말이다. 대통령이 분명한 국정 목표를 관료에게 제시하고 그걸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대통령제에선 대통령이 핵심이다.

‘차관 정치.’

윤석열 정부에서 새롭게 등장한 단어다. 지난 6월 장·차관 인사에서 대통령실 비서관을 대거 정부 부처 차관으로 내려보내자 언론에선 이를 ‘차관 정치’라 불렀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실세 차관들이 국정운영의 전면에 나서는 ‘차관 정치’를 예고했다. 내년 총선을 앞둔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반기부터 가시적인 국정 성과를 내기 위해선 추진력을 갖춘 용산 출신 차관들이 부처를 장악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평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사·검증 작업에 참여했던 청와대 비서관 출신 인사는 윤 대통령의 차관 정치를 꼭 비판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국정 철학과 목표를 공유하는 비서관들을 부처 차관으로 보낸 게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대통령제 취지에 비춰보면,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을 장관이나 차관에 임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을 비판하는데, 대통령의 제왕적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권력기관과 사정기관의 운용이다. 누군가를 표적 삼아 조사하거나 집회·시위에 과도하게 대응하는 것, 이런 건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정책 집행은 다르다. 정부 입법을 하려 해도 관료들을 통해서 해야 한다. 관료가 말을 듣지 않으면 손발이 묶인 느낌을 받는다. 그렇기에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을 장·차관으로 보내 관료 조직을 움직이려는 시도는 당연한 통치행위의 일환이다.”

 미국에서 정부 고위직 임명 기준을 대통령과의 이데올로기 공유에 맞춰서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가 로널드 레이건이다. 1980년 11월 대선에서 ‘미국 자존심의 부활’을 내걸고 승리한 레이건 대통령은 행정부 고위직을 임명할 때 ‘철학적 확신’을 가장 중요하게 내세웠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인사국장을 지낸 펜들턴 제임스는 “우리는 (행정부 후보 명단을 추릴 때) 철학적 확신, 청렴성, 다부짐, 역량, 팀 플레이어를 다섯 가지 기준으로 삼았다. 그중 첫 번째 조건은 레이건에 대한 철학적 확신이었다. 만일 누군가 이 행정부에서 일하게 된다면 먼저 레이건의 정책 목표를 알아야 한다. 대통령이 윤곽을 그린 프로그램에 철학적으로 잘 맞는 사람인가, 이것이 첫 번째 인사 기준이었다”고 헤리티지 재단 세미나에서 말했다. 장관뿐 아니라 부처 내 고위직도 이런 기준으로 백악관에서 인사를 주도했다고 펜들턴 제임스는 말했다.

윤 대통령이 부처 차관에 측근 인사를 대거 임명한 건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문제는 장관의 역량이다. 차관보다 더 중요한 건 장관이다. 각 부처에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전파하고 관료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포스트가 바로 장관이다. 장관이 유능해야 관료들이 따른다. 펜들턴 제임스를 비롯해 백악관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핵심 참모들은 ‘대통령과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공유하는 것’ 못지않게 ‘행정 능력을 갖춘 각료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역량이 떨어지는 장관’을 그대로 둔 채 대통령실에서 차관을 내려보내 부처를 움직이겠다는 건 가능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다. 새만금 잼버리 대회의 참담한 실패엔 조직위원장을 맡은 여성가족부 장관 개인의 무능이 크게 작용했다. 얼마 전 이뤄진 3개 부처 개각도 장관 개개인의 역량 평가보다, 대통령의 이념적 확신(신원식 국방부·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과 개인 친분(김행 여성가족부)에 기반해 인사가 이뤄졌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김행 후보자의 낙마는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다.

역량이 떨어지는 장관’과 ‘대통령 신임을 받는 실세 차관’ 조합은 공무원들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인사 문제를 더욱 정치화한다. 예전과 비교해서 요즘 관료사회의 달라진 모습 중 하나는, 대선 때 퇴직 관료들이 대거 후보 캠프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과거엔 특정 후보를 돕더라도 물 밑에서 돕는 걸 선호했다. 요즘엔 공개적으로 캠프에 이름을 올리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정권을 잡은 뒤 부처 고위직이나 산하기관장으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부처의 국장급 공무원은 “장·차관은 물론이고 산하기관장이나 하다못해 산하기관 임원이라도 하려면 캠프에서 분명하게 ‘우리 편’이라는 인식을 받아놓아야 한다는 게 요즘 분위기다. 후보 캠프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산하기관장 한자리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관료 사회에 두 가지 상반된 기류를 형성한다. 고위직 공무원은 현 정권 5년 임기 안에 최대한 승진을 노린 뒤 차기 대선에선 선거 캠프로 뛰어든다. 반면에 중·하위직 공무원은 정권이 바뀌어도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현 정권의 논란 있는 정책에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걸 꺼린다. 차관급을 지낸 전직 고위 관료는 이런 얘기를 했다.

(관료 사회에) 상층부와 하층부의 분화가 일어났다. 상층부는 새로 들어오는 정권에 적응해서 마지막 승진을 해야 하니까 정치에 더 해바라기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현 정권 임기 안에 승부를 보려는 상층부와 달리, 중·하위직 공무원들은 정권의 국정 목표보다 내부 평판에 더 신경 쓰고, 나중에 생길지 모를 정치·사법적 논란을 피하는 데 힘을 쏟는 분위기가 커졌다. 과거엔 대통령실에서 근무하는 게 유능함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5년이라는 제한된 임기 내에 정책 성과를 거두려면 관료들의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인사라고 전·현직 관료들은 말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능력에 기반한 인사가 관료 사회의 책임감을 높인다. 외부에서 오든 내부에서 승진하든, 능력 있는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장관 중심으로 일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엔 장관에 기용된 관료 대다수는 정치적 성향과 별개로 ‘할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란 평가를 받았다.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 이걸 대통령 철학을 잘 아는 차관으로 메꾸려는 건 한계가 있다.

10월6일 국회에서 열린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 여당인 국민의힘 의원과 김 후보자의 자리가 비어 있다. 인사청문회는 김 후보자가 돌아오지 않아 그대로 끝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좋은 사람의 발탁과 잘못된 인사의 과감한 교체가 어려운 데엔, 인사청문회 부담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국민 신뢰와 유능함을 함께 갖춘 사람을 뽑자는 애초 취지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다. 과도한 정치 공세의 장으로 변하면서 약간의 개인 흠집만 있어도 낙마하는 사례가 잇따르더니, 이제는 심각한 흠결과 업무능력에 의문이 제기돼도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는 ‘통과 의례’가 되어버렸다.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의 생사를 결정짓는 건 더는 유능함이나 도덕적 깨끗함이 아니다. 진영의 지지가 얼마나 확고한지가 훨씬 중요하다. 인사청문회가 첨예한 진영 대결의 장으로 흐르면, 장관 후보자는 아무리 도덕적 흠결이 있고 무능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대통령이 이걸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순간 인사는 왜곡된다. 대통령은 인사청문회 본래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사람을 고르기보다 지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우리 편’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을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게 된다. 어차피 일은 차관이 하면 되니까 장관은 진영 결집의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청문회장에 나온 장관 후보자들이 갈수록 공세적으로 국회의원 질의에 반박하고 강성 발언을 쏟아내는 건 이 때문이다. 장관 후보자가 청문회 도중에 자리를 이탈해서 돌아오지 않는 전례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료의 정치화’에는 분명한 국정운영 방향과 정책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종신 집권을 추구했던 박정희 시대와 달리 5년 임기 대통령은 훨씬 능동적으로 관료들을 이끌어야 한다. 혼자의 힘으로 다할 수는 없기에, 관료가 따를 수 있고 관료를 제어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사람을 장·차관 등 주요 공직에 발탁하는 게 긴요하다.

1960~80년대에 관료들이 뛰어난 성과를 보인 건, 선진국 경험을 벤치마킹할 수 있었던 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후발 국가로서의 장점을 한국 관료들이 잘 활용했던 셈이다. 선진국 수준에 올라선 지금은 관료들이 예전처럼 특별한 정책 아이디어를 내기 쉽지 않다. 그 역할을 대통령과 집권 세력이 해야 한다. ‘그래도 나름 유능한 관료제가 있으니까 누가 집권하든 정부는 그럭저럭 굴러갈 것’이란 건 옛말이다. 대통령이 분명한 국정 목표를 관료에게 제시하고 그걸 밀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결국 대통령제에선 대통령이 핵심이다.

박찬수 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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