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이라 너무나 공감되는, 설득력 있는 악의 탄생('악인전기')
[엔터미디어=정덕현] "아는 사람이 복권에 당첨됐어요. 당첨자가 누군지 모를 땐 상관없었는데 아는 사람이라니까 기분 묘하더라고요. 그 복권 제가 사라고 부추겼거든요. 번호도 제가 불러 주고. 살짝 배가 아프더라고요. 근데 나중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헛헛함 같은 게... 되게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내 인생이 복권 한 장만도 못한 것 같은 기분?"
ENA 일월드라마 <악인전기>에서 한동수(신하균)는 편의점 앞에서 이웃인 마철진(권혁) 형사를 만난다. 끊었던 담배를 사서 막 불을 붙이려던 참에 나타난 마형사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묻자 한동수는 자신의 처지를 복권 당첨 이야기에 빗대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아는 사람'이란 바로 유성파 2인자였지만 그가 제안하고 실행한 인터넷 도박 사업 성공으로 이제 1인자인 김재열(주진모)를 제치고 막강한 힘을 갖게 된 서도영(김영광)이다.
어쩌다 살기 위해 서도영의 손을 잡았고, 그에게 사업 제안을 했으며 나아가 그 사업을 성공시켰던 한동수였지만, 그 생존의 단계를 넘어서면서 그는 서도영이 생각보다 엄청난 돈을 벌어졌다는 사실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사업 성공에 대한 보수를 두 배로 받았지만 그보다 더 큰 돈을 벌었을 서도영을 보며 문득 일은 자신이 다 한 것 같은데 그 돈이 다 그에게로 간다는 게 어딘가 그의 밑바닥에 꾹꾹 눌러 놓았던 욕망을 고개 들게 만든 것.
게다가 한동수는 서도영을 만난 후, '열심히 산 것 같지만' 그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됐다. 아내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당한 성추행 사건 소송에서도 상대인 문 로펌의 문해준(최병모)에게 질 게 뻔했지만, 서도영이 나서서 아예 문해준을 법정에 오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그는 승소할 수 있었다. 또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접견실을 들락거리며 단돈 만 원을 벌기 위해서 별의 별 짓을 다해왔던 그는, 서도영의 조직과 함께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를 여는 것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됐다. 한동수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 자체가 의미 없어 보이는 헛헛함을 느끼게 됐다.
그런데 한동수가 느끼는 이 헛헛함이나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욕망 같은 것들은 과거 서도영 역시 1인자인 김재열 밑에서 일하며 느꼈던 것들이었다. "나는 김재열이 얼마 버는 지 참 궁금했어요. 일은 다 내가 하는 거 같았는데... 인간이 다 그래요." 서도영이 한동수에게 툭 던지는 그 말은 그래서 한동수가 서도영에 대해 느끼는 그대로다. 절대적인 악으로서의 서도영과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악을 선택한 한동수는 이처럼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정도의 차이 정도가 있을 뿐.
즉 <악인전기>는 악의 탄생이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부조리에서 촉발된 엇나간 욕망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동수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종종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서민들의 등을 쳐 수백억 사기를 벌이고도 그 돈의 힘으로 법의 보호를 받는 범죄자들이나,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 그 권력으로 사적 치부를 하는 정치인들 나아가 돈의 힘으로 영세상인들을 밀어내고 막대한 돈을 벌고도 탈세를 일삼는 기업인들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그것일 게다.
이러한 감정은 법을 집행하는 경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도 그런 거 가끔 느끼는데 범죄 수익금 환수 할 때 이게 내 월급의 몇 배인가 생각하면 정말 일하기 싫어요. 쉽게 벌고 쉽게 쓰는 놈들 세상엔 이렇게나 많은데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한동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마형사의 말에도 그 박탈감은 똑같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악인전기>가 흥미로운 건 악을 그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괴물들이 저지르는 어떤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점이다. 한동수처럼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온 이들도 어떤 순간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되면 바로 그 악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 서도영을 만난 후 조금씩 변화해가는 한동수의 모습은 그래서 공감이 간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끼친다.
결국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악을 그려나가는 <악인전기>라는 작품은 이 인물의 감정변화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리는가가 관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는 서도영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차츰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의해 변화해가는 한동수를 공감가게 표현해내는 신하균의 연기는 이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아쉬워도 발을 빼려 했지만 문 로펌 문상국(송영창) 대표의 사주로 어머니가 죽게 되자 다시 서도영에게 손을 내미는 한동수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런 박탈감이 모두를 악으로 이끌진 않는다. 마치 답답한 현실에 모두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사서 피우지는 않듯이 말이다. 마형사는 그래서 자신의 직업에 맞게 한동수를 위로하려 한다. "근데 뭐 다들 이렇게 우리처럼 아등바등 살아가잖아요? 또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거고. 뭐 일어날까요? 여기 있다간 괜히 한 대 피우고 싶어질 것 같은데..." 하지만 이처럼 스스로를 포함해 던지는 위로의 말에도 쓸쓸함과 헛헛함은 어쩔 수 없다. 그게 아마 대부분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마음일 테니.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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