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들을 위한 무대 만든 ‘여성동아’의 노력
최신 유행과 소소한 생활의 지혜, 문화와 관련한 소식까지. 언제나 그렇듯 잡지는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와 통찰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정보가 부족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여성동아’ 표지화의 의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단순히 동시대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미술 부문에서 새로운 무대를 만들려는 시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신가정’ 표지에 등장한 청전 이상범의 낯선 서양화 기법에 대한 도전을 시작으로 '여성동아’는 한국 작가들에게 우리의 고유한 여성 초상화를 주문한다. 표지화 작업에 참여한 작가들은 신인 시절의 성장 가능성을 드러내는 초기작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미 한국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 왜 자신이 그런 평가를 받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그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쾌대, 문학진, 김기창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숨겨졌던 작품들을 발견하고 이 그림들이 그려진 시기와 작가의 행적을 따라간 이 기록은, 옛 사연이 보관된 창고를 발견하고 그 안에 빠져 이것저것을 뒤져보는 느낌이 들게 했다.
11월 3~12일 열릴 '여성동아’ 창간 90주년 기념 전시 '외출감행: 1933 신여성 여기, 오다’ 준비 과정에 참여하면서, 1980년 7점의 표지화를 남긴 장완 화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여성동아’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당시를 회상하며 "기쁘고 자랑스럽고 흥분되었노라"고 말했다. 많은 관람객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부재했던 시대, '여성동아’의 표지에 자신의 그림이 걸리는 사건은 정말로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책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지만 그 사이에도 여전히 예술에 매진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작은 무대를 마련한 '여성동아’는 대중과 작가를 잇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본인이 그려낸 아름다운 여성들의 모습이 '여성동아’의 표지가 돼 수많은 사람에게 소개되던 때의 기쁨을 전하는 노화가는 생기를 띠었다. 이런 작은 기회조차 작가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가움은 이미 확고한 명성을 확보한 대가들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 꿴 보석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재건의 시기를 통과하며 우리의 역사는 어둡고 힘들었다. 생존의 문제를 마주할 때 예술이니, 창작이니 하는 것은 허황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작가 정신을 지켜온 이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문화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어려운 시절 대중매체가 표지화로 작가들의 순수 작품을 실어주는 기획, 이런 작은 노력 덕분에 작가들은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았을 것이다.‘여성동아’ 표지화만 놓고 보더라도 한국에서 서양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작가들이 서양화 기법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시장의 벽을 채울 그 표지화는 작가들의 고심의 기록이다.
기억을 되짚고, 훼손된 것을 복원해 한자리에 모으는 기획은 중요한 일이다. 과거에 묻혀 있는 구슬에게 다시 빛을 주고 꿰어 보배로 만드는 일이다. 이번 전시 '외출감행: 1933 신여성 여기, 오다’에서는 브릭이나 테이프로 작업하는 현대 작가가 과거의 표지화를 재해석한 작품도 함께 전시된다. 이는 작은 보물들에 담긴 값어치를 더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복고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고, 유행은 돌고 돈다고들 한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트렌드를 끄집어낸다고 해서 다시 유행이 되는 건 아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이를 지금의 시대에 맞추는 재해석이 있어야 동어반복을 넘어 진정한 레트로가 된다. 그간 잊혔던 그림이 다시 전시장에서 조명을 받고, 작가들의 이야기가 새 생명을 얻고, 과거의 작품을 존경하는 후배들의 그림이 나란히 놓여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전시회를 기대한다.
안현배는
파리 제1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사를 공부했다.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소에서 '예술과 정치의 사회학’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사학자로서 예술을 사회와 역사의 관계 속에서 살핀다. 저서로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의 예술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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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안현배 예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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