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도, 보험사도 외면하는 발달지연 아동…“치료 중단 위기”
치료비 늘자 현대해상 “다 못줘”, 애타는 부모들
[주간경향] “여기 계신 모든 분께 부탁드립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지난 10월 12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국정감사 현장. 발달지연 자녀를 둔 한 여성이 울먹이며 발언을 마쳤다. 질의하던 위원도, 듣던 장관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국감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성은 현대해상이 올해 5월부터 발달지연 치료비(실비) 지급을 중단하자 피해를 호소하러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안타깝다. 정부가 약관을 살펴보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대답했다.
현대해상과 가입자 간 발달지연 치료비 지급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건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매년 치료비 청구 및 지급이 큰 폭으로 늘자 보험업계가 자체 조사에 착수했고, 일부 부적절한 청구사례가 확인됐다. 그러자 발달지연 치료가 무자격 의료기관에서 이뤄진 점 등을 문제삼아 어린이 보험업계 1위인 현대해상이 실비 지급을 제한하고 나서면서 사태가 본격화됐다.
이 문제는 ‘흔한’ 보험금 지급 분쟁 사례가 아니다. 넓게 보면 발달지연이라는 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의료 공백’ 문제다.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국가 지원이 크게 부족한 가운데 민간 실비보험에 치료비를 의존해야 하는 각 가정의 현실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의료계에서 추산하는 발달지연 아동 수만 전국 24만여명. 지금부터라도 발달지연 아동 지원을 위한 각종 기준을 마련하고, 제도 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책과 경제난…발달지연 아동 가정 ‘이중고’
발달지연이란 발달 선별검사에서 해당 연령의 정상 기대치보다 25%가 뒤처져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잘 앉거나 서지 못하는 대근육 문제부터, 물건을 손에 쥐거나 잡지 못하는 소근육 문제, 언어·인지 발달 문제, 사회성(사회생활) 문제 등으로 나타난다. 장애 판단을 내리기엔 아직 이르거나, 향후 치료 등을 통해 지연 상태를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자폐증, 지적장애 등 장애 진단이 확정된 ‘발달장애’와 구별된다. 발달지연에는 선·후천적 원인이 다양하게 거론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규명된 것은 없다. ‘원인 불명’이란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부모 중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발달지연 자녀를 둔 부모들은 가슴에 ‘돌덩이’를 얹고 산다. A씨는 “발달지연이란 얘기를 듣고 의사 선생님이라지만 남 앞에서 그렇게 울어본 것은 난생처음”이라며 “처음에는 아이를 너무 일찍 어린이집에 보내서 그랬나 자책도 많이 했다. 발달지연 자녀의 부모 모두가 ‘내가 뭔가 잘못했나’ 하는 자책을 하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에 출산했다는 B씨는 “아이가 좋아지지 않으면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며 “아이가 마음껏 뛰고 걷고, 친구도 사귀며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면 부모로서 죄인이라는 숙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자녀가 발달지연의 일종인 ‘원인 불명의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는 C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책읽기에 대한 불안감이 심해져 결국 항불안제를 먹이게 됐다”며 “어른도 먹기 힘든 약을 아이에게 먹이려니 가슴이 정말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자녀 치료를 위해 큰 경제적 부담도 져야 한다. 발달지연 아동의 경우 언어치료, 재활치료는 물론 놀이치료, 감각통합(감통), 음악치료, 미술치료 등 아동의 지연 정도에 따라 다양한 치료를 받는다. 문제는 이런 치료가 모두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비급여’라는 점이다. 보통 하나의 치료당 주 2회, 월 8회로 진행하는데 한번 치료를 받을 때마다 7만~8만원에서 많게는 17만원까지 비용이 들어간다. A씨는 “언어치료 하나만 받는데도 월 80만원가량을 지출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치료를 일주일에 2~3과목 이상 진행하다 보면 치료비가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단기간에 치료가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수년간 비용 지출을 각오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발달지연 진단이 나오면 병원 측에서 부모의 직업이나 재정상황을 먼저 물어보기도 한다. B씨는 “오늘이 월급날인데 남편이 빚을 갚으러 갔다. 발달지연 가정치고 빚이 없는 가정은 드물 것”이라며 “마이너스통장은 기본이고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가족이나 친척, 지인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아이 치료를 위해 부모 중 한명이 일을 그만두기도 한다. 치료 일정을 챙겨야 하고, 아이를 보육기관에 맡길 경우 언제 보육기관에서 아이 문제로 “와달라”는 연락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제적 문제나 아이 치료에 대한 관점의 차이, 아이 돌봄 과정의 스트레스와 피로 등으로 곧잘 가정불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0~19세 발달지연 진료 환자는 2018년 6만4085명에서 2022년 12만6183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올 2023년 상반기(1~7월)까지는 10만7564명으로, 현재 추세라면 지난해의 약 2배 이상이 될 것으로 강 의원은 추정했다. 특히 0~9세 아동에서 발달지연 진료가 늘었다. 0~3세 아동 환자는 2018년 2만9665명에서 지난해 5만1217명, 같은 기간 4~5세 환자는 1만3188명에서 3만213명, 6~9세 환자는 1만3067명에서 2만9070명으로 증가했다.
발달지연 아동은 늘고 있지만 정부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진료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거점병원이나 치료센터부터 턱없이 적은 탓이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발달장애인법)’에서는 국가와 지자체가 발달장애인 의료 지원을 위해 거점병원과 행동발달증진센터를 두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전국 17개 광역 지자체 중 거점병원과 센터가 있는 곳은 8곳뿐이다. 올 7월에 발달장애인법을 개정해 거점병원 등이 없는 곳에도 설치를 의무화했지만, 실제 시행은 1년 6개월 뒤로 미뤄졌다. 당초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 초안에는 법안 통과 후 ‘6개월 이내’ 거점병원 등의 설치를 의무화했지만, 국회 논의 과정에서 시행 시기가 밀렸다.
국자 지원 ‘있으나마나’, “유튜브 보면서 배워”
급증하는 환자에 비해 병원이나 센터가 적기 때문에 진료나 치료를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자폐증이나 지적장애 등 발달장애인들도 같이 이용하다 보니 진료 예약조차 잡기 어렵다. 대학병원(종합병원)의 치료센터 역시 붐비는 환자들로 일상적인 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민간 인프라가 부족하다.
A씨 등은 “종합병원 센터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기본 대기가 1~2년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며 “대기를 해놓고 있다가 자리가 났대서 보면 기존에 진행 중인 치료 시간과 일정이 맞지 않아 이용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번 국감에서 공개한 내용을 보면 종합병원급 센터의 경우 평균 치료 대기기간이 200일, 최장 900일이 넘는 곳도 있다.
발달지연 치료가 대부분 비급여인 데 반해 정부 지원금액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다. 현재 발달지연 아동에게는 ‘발달재활 지원’으로 바우처 형태의 지원금을 지급한다. 최대 지급액이 그러나 월 25만원으로 적은 데다, 소득이 높을수록 지급액은 더 줄어든다. 지급대상 역시 ‘만 6세 이하’로 한정돼 있고, 지자체의 재정상황에 따라 바우처가 고갈되면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강은미 의원은 “전체 발달지연 환자의 증가 사례 중 영·유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바우처 확대와 금액의 상향 등 관련 예산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발달지연의 조기 진단과 치료에 관한 정부 차원의 지원체계도 아직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발달지연 아동이 전국에 몇 명인지 등에 관한 기초적인 자료조차 없다. 정부는 지난 4월 “실태 파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해 12월에는 “육아종합지원센터, 의료기관 및 재활서비스제공기관을 연계해 발달지연 검사-상담-재활·치료 서비스의 연속적 지원체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복지부 관계자)고 했지만, 가정에서는 별 체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A씨는 “병원에서 발달지연 진단 확정 후 지자체 등 여러 곳에 문의해봤지만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가 무엇인지 등을 알기 위해 맘카페나 블로그, 유튜브 등을 주로 참고하고 공부해야 했다”고 말했다.
수년째 급증하는 환자와 정부의 무관심 그리고 막대한 의료비 문제에 직면해 있는 발달지연 가정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건 민간실손보험뿐이었다. 현대해상의 발달지연 아동 실비 지원금 미지급 사태는 방치돼온 발달지연 아동 문제가 곪을 대로 곪은 뒤 터져나온 결과물이다.
보험업계가 집계한 발달지연 관련 주요 5개 보험사가 지급한 실손보험금 규모를 보면 2018년 190억원에서 지난해 1185억원으로 4년새 5배 이상 늘었다. 보험금 지급이 급증하자 보험업계는 자체적으로 발달지연 치료 현황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소아정신과, 소아청소년과 등 발달지연 진료 및 진단과 별 연관성이 없는 안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한방병원 등에서 자체 발달지연치료센터를 운영하는 사실을 다수 확인했다.
현대해상 “보험금 선별 지급”, 의료계 “이러다 치료시기 놓쳐”
일부 병원에선 발달지연센터 개소를 전문적으로 하는 일명 ‘브로커’가 개입해 센터를 열고, 센터 운영을 의사가 아닌 브로커가 내세운 비의료인이 맡는 사례도 확인됐다고 보험업계는 주장한다. 이 같은 센터에서는 대부분 민간자격증을 소유한 치료사들이 아동 치료를 맡고 있는데, 이 역시 의료법 위반 소지 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아동실손보험 시장 점유율 1위인 현대해상은 실손보험금 지급 기준을 변경하고, 해당 사실을 가입자들에게 통보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정당치 못한 보험금 청구가 많아질수록 결국 전체 보험가입자가 피해를 보게 돼 취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간 실비 청구를 통해 자녀 치료비 보조를 받아온 보험가입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현대해상이 명확한 기준제시나 별다른 예고도 없이 갑자기 보험금 지급 기준을 바꾸면서 상당수 아동이 보험금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보험금 중단으로 자녀들의 치료가 중단될 위기에 놓인 가정들도 많다.
보험금 지급 기준을 놓고선 현대해상과 가입자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보험금 미지급 피해를 호소하는 가입자들은 “현대해상이 제시한 기준을 보면 사실상 종합병원 산하 센터에서 치료를 받아야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며 “예약 및 대기시간 등 문제로 종합병원 센터의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점을 감안하면 보험금을 주지 않겠다는 뜻과 마찬가지”라고 주장 중이다.
C씨는 “현대해상 조치 뒤 아이를 담당하던 직원이 바뀌어 치료의 연속성이 중단될 위기”라며 “아이 치료를 위한 시간이 일분일초라도 아까운 부모들은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미술치료 업무를 해온 한 민간 자격사는 “일이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환자가 줄면서 일을 그만둔 자격사도 주변에 많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발달지연 치료 관련 자격 문제 등도 명확히 정리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현대해상은 “아동의 지속적인 발달지연 치료가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동시감정’을 거부한 가입자나 보험금 지급 기준 연령(만 5세 이하)을 넘은 아동 등 일부 경우에 한해 지급이 제한되고 있을 뿐 종합병원 유무 관계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주장 중이다.
현대해상 보험가입자 모임인 ‘발달지연아동 권리보호 가족연대’는 “문제가 되는 병원이나 센터가 있다면 가입자들이 이용하지 않도록 안내를 하면 될 일”이라며 “보험금 지급액이 늘어 재정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일부 문제를 빌미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건 계약위반이자 무책임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한 보건의료업계 관계자는 “국가가 지원하고 부담해야 했던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의료비가 민간에 전가돼왔고, 수년간 비용이 누적되면서 결국 갈등이 촉발된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발달지연 의료비를 급여화하고, 각종 지원을 위한 공공의료체계를 정비하는 등의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양동 대한소아청소년행동발달증진학회 이사장은 “보험금 지급 문제로 치료 시기를 놓쳐 발달지연 아동들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보험사들이) 종합병원만 고집할 게 아니라 진료 유관성이 있는 의원급 병원 치료센터 등에는 일단 보험금을 지급해 아이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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