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간 '할머니 체험'한 26살 디자이너…모두의 존엄성을 위하여

남형도 기자 2023. 10.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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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 선구자 패트리샤 무어(71)…20대 때 '80대 할머니'가 되어 직접 불편한 경험, '저상버스'나 '소리나는 주전자', '양손잡이 가위' 등 디자인…"모든 사람을 포용해 존엄성 지키는, 그런 디자인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26살에 4년간 80대 할머니로 분장한 패트리샤 무어. 불편함을 공감하기 위해 직접 경험해본 거였다. 그리고 알게된 것들을 디자인에 적용시켰다./사진=RIT Production Services

12살 소녀가 있었다. 이름은 패트리샤 무어(이하 패티)였다. 그를 키운 건 주로 할머니였다. 어머니는 패티를 돌봐주기엔 늘 바빴다.

할머니는 어린 패티를 위해 늘 맛있는 걸 해줬다. 패티도 할머니의 요리를 좋아했다.

그날도 할머니는 요리 준비를 하기 위해 냉장고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려고 했다. 문은 그대로인데 기력이 쇠한 걸 몰랐다. 매일 똑같았던 문이 육중해졌다.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애를 쓰다 그대로 그 앞에 쓰러졌다.

할머니가 그토록 좋아하던 요리, 주방에서 늘 덜그럭거리며 준비하던 소리. 그걸 못하게 한 건 고작 '냉장고 손잡이'였다. 패티는 그날 이후 할머니가 요리하는 걸 더는 보지 못했다. 2년이 흐른 뒤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20대 때의 패트리샤 무어./사진=RIT Production Services

소녀는 자라 26살이 됐다. 1970년대였다. 패티는 미국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전설의 코카콜라병을 디자인 한 바로 그 회사였다. 직원은 모두 176명, 그중 남자가 175명이었다. 여자 디자이너는 그밖에 없었다.

냉장고를 디자인하기 위한 회의 자리. 가장 어렸던 패티가 이리 제안했다.

"관절염을 앓거나 손힘이 약하면 냉장고 문을 열기 힘들지요. 그들을 위한 냉장고 손잡이를 만들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때 패티는 '냉장고 손잡이 따위' 때문에 요리를 포기했던, 할머니를 떠올렸을 거였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이랬다.

"패티, 우린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디자인을 하는 게 아니야."

몇 달이 지난 뒤 패티는 회사를 그만뒀다. 20대인데, 돌연 80대 할머니가 되어보기로 했다. 허연 가발을 쓰고 주름 분장을 했다. 귀는 솜으로 틀어막았고 안경은 뿌옇게 했다. 다리는 철제 보조기로 뻣뻣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걸 무려 4년이나 했다, 4년이나. 116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노인들이 겪는 불편을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선 디자인이 필요하단 걸.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도록 디자인했다. 이른바 '유니버설 디자인(성별이나 나이, 장애, 언어 등으로 인한 제약이 없도록 설계된 디자인)'의 선구자가 된 거다.

4년간 직접 노인 분장을 하며,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고민한 패트리샤 무어, 무어디자인 어소시에이션 대표./사진=남형도 기자

지난달 서울디자인재단에서 '패트리샤 무어'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놀랐었다. 그는 이번에 재단에서 진행하는 서울디자인어워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진심으로 궁금했던 건, 어떻게 4년이나 노인 체험을 했느냐다. 80대 노인의 하루를 살아본 적이 있었다. 패티처럼 분장하고, 관절 압박 장비를 착용했었다. 팔다리는 묵직해지고, 허리는 동그랗게 굽었다. 지팡이에 기대어 서울 시내를 힘겹게 다녔다. 고된 하루를 거쳐 밤이 되었을 땐, 온몸에 시퍼런 멍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걸 4년이나 체험했단 것. 직접 겪고 공감해야 보이는 게 있단 걸 아는 데다가, 그걸 끝까지 해내는 저력과 열정이 대단한 사람. 그러니 바쁜 일정을 분자 단위로 쪼개서라도 그를 꼭 만나고 싶었다. 24일 오후,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5층에서 패티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갤 절로 숙이게 됐다. 언어를 꺼내기도 전에 보자마자 전하는 존경이었다.

2019년에 80세 노인으로 분장하고, 압박 장비를 착용했었던 기자. 하루도 힘든 체험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50년 전 할머니 체험을 했던 패티는, 이젠 진짜로 71살이 되었다. 검은 상하의에 검은 구두. 동그란 단발에 시원한 웃음이 잘 어울리던 첫인상. 영어를 그리 잘하지 않는 탓에, 서울디자인재단에서 통역사님을 모셔주었다. 2시간에 걸쳐 많은 질문, 그보다 더 많은 대답이 오갔던 인터뷰. 그런데도 빼놓지 않고 빠르게 종이에 써가며 꼼꼼하고 정확하게 잘 전해준, 김민지 통역사님께 감사를 전한다.

씨앗 : 12살 때, 흑인 분장을 한 백인을 보며 울었다
불편함을 체험해 알고, 공감하고, 바꾸겠단 마음. 궁금했다. 그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온 걸지. 패티에게 그것부터 물었다.

"1950년대에 존 그리핀이란 작가가 있었어요. 굉장히 뛰어난 분이었지요. 이 분은 백인인데, 화학요법으로 흑인처럼 피부색을 바꾸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봐야지,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거니까요."

고전처럼 읽히고 있는 책 '블랙 라이크 미'의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 얘기였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1959년. KKK단(백인우월주의 비밀결사단체)이 흑인 목을 매다는 등 굉장히 심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흑인 차별을 직접 경험해본 백인, 존 그리핀.

그리핀은 온몸을 검게 물들여 흑인이 됐다. 흑인 차별이 심한 딥 사우스 지역을 7주간 여행했다. 차별과 편견을 몸소 체험해 기록했다. 그러느라 그리핀은 살해 위협까지 당했고, KKK단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책 내용을 잠시 보면 이렇다.

"중년 여자가 버럭 화를 냈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른 백인들이 목을 길게 빼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들 적대감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책 블랙 라이크 미 중에서)

패티는 '블랙 라이크 미'를 영화로 봤다. 그가 회상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함께 봤는데, 굉장히 많이 울었지요." 훗날 그리핀의 아내는 패티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기엔 이리 쓰여 있었다. "남편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정말 큰 감명을 받았을 거예요."

장면 : 주민들 스스로 파괴하던…빈곤한 동네를 다시 '디자인'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패티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였다. 1974년이었다. 함께 졸업한 동기 7명과 프로젝트를 하나 해보기로 했다.

"뉴욕 로체스터에 굉장히 빈곤한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거기에 직접 가보기로 했습니다. 주거 환경이 너무 나빴어요."

거기엔 공공주택이 있었다. 패티와 동료들은 거기 살던 흑인 부모,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백인들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단 것에, 그들은 놀란듯했다.

아이들이 자라기엔 안전하지 않았다. 삶의 질도 나빠 보였다. 본인들 집과 환경을 스스로 파괴하는 모습도 보였다. 벽에 크게 그라피티를 한다든지, 꽃을 심으면 다 뽑아버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패티는 "자기가 사는 곳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패티와 동료들은 열악했던 동네를 다시 디자인했다. 그로 인해 주민들 삶도 많은 게 바뀌었다. 그때 패티는 이렇게 깨달았단다.

"디자인의 힘이 정말 크단 걸 알았지요. 특히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는요."

태도 : "그냥 무조건 해내야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1979년부터 1982년까지, 4년간 85세 할머니로 살았던 패트리샤 무어./사진=RIT Production Services
그리 평소 꿈꾸던 걸 이루려 했다. 패티의 나이, 스물 여섯살 때였다. 뉴욕에서 가장 좋은 디자인 회사였다.

"디자인은 모든 이를 포용하는 것이어야 해요.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게 이 부분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시 디자인은 백인과 부유한 사람, 좋은 집을 가진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독거노인이나 휠체어를 탄 이들은 고려 대상이 아녔다. 포용적인 디자인을 하자고 패티가 얘기했을 때, 회사 직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변화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또 홀로 여성 디자이너였기에 낄 자리가 없었단다.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자 패티는 이리 답했다.

"그냥 무조건 해내야겠다, 생각했지요. 그게 옳은 길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끊임없이 나아가야겠단 생각만 했습니다. 낮엔 해야 하는 일들을 했고, 개인 시간엔 제가 원하는 일들을 했어요."

실행 : 85세 할머니가 되어보니…"하루를 조심스럽게 계획해야 한단 걸 알았지요"
/사진=RIT Production Services
우연히 바버 켈리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알게 됐다. 그는 TV쇼나 연극에서,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분장시켜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본 패티는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노인이 한 번 돼 볼 수 있겠다'고. 어떤 고민도, 주저함도 없이 실행했다.

패티가 노인 체험을 한 건, 비단 나이 든 이들을 위해서만은 아녔다.

"어려도 관절염이 생길 수 있고, 나이 들어도 관절염이 없을 수 있지요. 젊은 노동자여도 현장에서 일하다 다칠 수 있고, 아기도 장애를 갖고 태어날 수 있고요."

그렇기에 궁극적으론, 디자인을 통해 모든 이들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패티는 4년간 '80대 할머니' 체험을 했다. 몸이 약해진 뒤 깨달은 건, 하루 계획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단 거였다. 예컨대, 할머니가 시장에 가려면 중간에 화장실을 들러야 할까 고민해야 한단 거다. 방광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이런 걸 다 계산하게 된단 거였다. 패티는 "이에 맞춰서 살아야 한단 걸 알았고, 그게 디자인하는데 큰 교훈이 됐다"고 했다.

변화 : 산에서 굴린 작은 눈덩이가, 아래에선 큰 뭉텅이가 되듯
/사진=EBS 지식채널e
노년의 불편함을 이미 20대에 알게된 사람, 그리고 디자이너. 그는 바람대로 '모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디자인을 했다. 바꿔나갔다.

높은 계단을 낮춰 '저상버스'를 설계했고, 왼손잡이도 편히 쓸 수 있는 '양손잡이를 위한 가위'를 만들었다. 물이 끓어도 잘 듣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해 '소리가 나는 주전자'를 디자인했다.

패티는 "정말 모든 프로젝트에 다 적용했다"고 했다. 한국에선 최근 수년간 삼성, LG, 기아와 유니버설 디자인을 많이 논의했단다. 다국적 기업의 수많은 디자이너와 협업하는 건 큰 힘이었다. 이리 비유했다.

"산꼭대기에선 굉장히 작은 눈뭉치가, 밑으로 갈수록 엄청 커지잖아요. 서로의 정보와 영감을 나누며 아이디어가 계속 붙는 거지요. 결국엔 되게 좋은 아이디어가 돼 바꿀 수 있게 됩니다."

그리 디자인한 게 노인이 된 그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언젠가부턴 더는 운전할 수 없게 됐다. 언젠가 패티가 열차를 탔을 때였다. 탑승하려고 보니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열차'란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열차는, 어르신들도 편히 탈 수 있게 돼 있었다. 그걸 보며 기쁨과 자긍심을 느꼈단다.

도전 : "저도 100% 이뤄내지 못했습니다, 계속 밀어붙일 수밖에요"
패트리샤 무어가 디자인한 제품들.
더 큰 영감을 받은 건, 지금도 계속 그 도전을 하고 있단 거였다. 71살의 나이가 될 때까지도.

어려움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나라 얘길 했다. 서울 시내에 저상버스 도입률이 여전히 얼마나 낮은지, 또 다른 지역은 그보다 턱없이 부족하단 것도. 변화가 얼마나 더딘지, 그 이유가 대부분의 무관심 때문이란 것까지. 토로하듯 패티에게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느냐고. 패티가 답했다.

"미국은 평등한 디자인을 위해, 법이 굉장히 엄격한데요. 그런데도 여전히 다 적용된 건 아니에요. 왜일까요. 자기가 그 입장에 처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부모가, 예컨대 시력을 잃거나 뇌졸중이 오거나 해야 비로소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패트리샤 무어가 디자인한 제품들. 잡기 편한 감자칼.

100% 이뤄내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의 선구자조차도. 그 역시 당연히, 매번 장벽에 맞닥뜨리게 된단다. 그럴 때마다 계속 밀어붙이고, 나아지길 바라며 시도하는 것뿐이란다. 위로되는 말이었다.

어쩐지 하소연을 하게 됐다. 정부나 기업의 예산과 정책이, 다수를 향해 있으며 잘 안 바뀐다고. 패티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가 고갤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정부나 기업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주된 '구매자'와 '사용자'가 다르다고 얘길 해요. 예를 들면 애플 에어팟은 저는 필요 없고 관심이 없지만, 조카나 친구 아이들에게 깜짝 선물을 주거든요. 구매자가 사용자에게 선물을 주는 방식이잖아요. 디즈니가 이걸 빨리 간파했어요. 조부모들이 손주들에게 티켓을 구매하도록요. 그래서 광고에, '조부모'를 포함해 내보내곤 합니다."

그러니 나이 든 이들을 배제하고 무시하는 건, 그들의 잠재 고객에게 그러는 거나 마찬가지란 경고였다.

패트리샤 무어가 기자에게 조언한 건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였다. 쓰는 기사들이 사람들 삶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어떤 이들이 읽을지 모른다고,/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

어느 오래된 박물관에 나무 계단이 있었다. 2015년, 패티는 공주가 된 기분으로 거길 올랐다. 1800년대에 여긴 어땠을까, 그런 얘길 했다. 그러나 몇 년 뒤 다릴 다쳤다. 그리고 다신 그 계단을 오를 수 없게 됐다.

패티는 이게 인생인 것 같다고 했다. 또 한국의 디자이너들에게 전하고픈 말이라고도 했다.

"때론 좋은 시기가 있고, 때론 안 좋기도 해요. 때론 내가 회복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이 모든 삶에서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이뤄져야 해요."

끝으로 들은 대답이 가장 큰 응원이 됐다. 마지막 질문은 이거였다. "힘든 과정이었을 텐데, 포기하고 싶은 적이 없었느냐"고. 통역사의 말이 미처 전해지기도 전에, 패티가 대답했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단 한 번도 없어요. 제 선택을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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