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김산의 마지막을 찾아서[현장답사기]
1960~1980년대 젊은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일 것이다. 님 웨일즈는 미국 AP통신 기자인 남편 에드거 스노를 따라 1937년 중국 옌안(延安)에 들어갔다.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대결 혹은 합작을 거듭하면서 후퇴하는 장정을 수행 중이었다.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인 홍군(팔로군)은 장정의 막바지에 이르러 옌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님 웨일즈는 남편 에드거 스노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나 취재할 때 한 조선인 남자를 만나 인터뷰했다. 그 조선인 청년은 고향(평북 용천)에서 3·1운동에 가담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간 청년이었다. 그는 16세에 광활한 대륙 중국에서 조선독립군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팔로군과 함께 옌안에 들어온 그 조선인 청년은 님 웨일즈를 만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얘기했다.
님 웨일즈는 미국으로 돌아와 당시(1941년) 인터뷰 내용을 <아리랑 (Song of Ariran)>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님 웨일즈는 그 조선인 청년을 ‘김산(金山)’이라고 했다. 물론 가명이었다. ‘중국혁명에서 한 공산주의자의 생애’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미국인에게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 책도 안 팔렸고, 출판사는 큰 손실을 봤다고 한다.
사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한국에서 먼저 본격적으로 소개됐다. 해방 후 잡지 ‘신천지’는 1946년 10월호부터 1948년 1월호까지 <아리랑>을 번역해 소개했다. 신재돈이 번역한 <아리랑>은 ‘아리랑- 조선인 반항자의 일대기’라는 제목으로 16회 연재됐다. 이 연재물은 그러나 큰 관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궁금증 불러모았던 김산의 정체
대신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한국 유학생들에게 조용히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국제정치학) 중이던 백선기(서울대 강사)는 “컬럼비아대학 브로드웨이 거리에 있는 한국 유학생 단골집 형제주점에서 <아리랑>에 대한 한 동문의 독후감을 감명 깊게 경청했다”면서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다”고 말했다(백선기·<미완의 해방노래- 비운의 혁명가 김산의 생애와 아리랑> 서문).
이 <아리랑>을 들고 귀국한 사람은 기자 리영희였다. 고 리영희 교수는 1959년 가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미국 6개월 연수를 다녀오다 도쿄의 한 서점에서 만난 일본어판(1953년 조일서방판)에서 자신과 <아리랑>의 인연이 비롯됐다고 생전에 밝혔다(<아리랑> 동녘·1984·추천의 글). 그는 “어느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처음 읽으면서 받은 감동은 그 후 나의 삶의 방향과 내용에 지울 수 없는 크고 깊은 흔적을 남겼다”면서 “지난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 속에서 가끔 <아리랑>을 펼치는 것은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리영희는 주변 친구들과 ‘김산이 누구인가?’라는 수수께끼 풀기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김책 아닐까, 최용건 아닐까, 김두봉이 제일 가까운데 등 그럴싸한 여러 인물이 거론됐지만 조선공산주의혁명, 광복 운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이들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1961년 님 웨일즈는 김산의 본명이 ‘Chiang Chi-rak’이라고 공개했다. 하지만 누구인지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님 웨일즈 역시 김산의 정확한 한자 이름을 몰랐던 것이다. 님 웨일즈가 밝힌 ‘Chiang Chi-rak’이 조선인 ‘장지락(張志樂)’임을 밝힌 것은 1972년 서대숙 하와이대 교수가 쓴 <한국공산주의 운동사>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서대숙 교수는 <아리랑>에서 장지락의 활동이 과장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서대숙 교수의 논평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평가하는 등 장지락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1984년 동녘출판사에서 <아리랑>을 번역해 출간했다. 이 책은 출판과 동시에 금서로 지목됐다. 이 책은 그러나 대학가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무려 15만 부가 판매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1986년 학민사 출판사에서 장지락의 한국에 관한 사실을 보충한 <아리랑 2>를 펴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장지락의 행적을 추적(답사)하기 시작했다. 재미 의사 노광욱은 님 웨일즈를 만나 취재노트를 찾는 등 김산의 마지막 행적을 취재했다. 앞서 언급한 백선기는 한국·중국·일본을 돌아다니며 김산의 행적을 모아 1993년 <미완의 해방노래- 비운의 혁명가 김산의 생애와 ‘아리랑’>이라는 책을 냈다.
장지락의 행적을 추적한 이들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일본 교토대 교수도 김산의 족적을 찾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재일교포 이회성·김찬정은 김산의 마지막을 추적해 1987년 11월 잡지 ‘민도(民濤)’ 창간호에 “김산은 1938년 ‘일본 특무’라는 죄명으로 옌안에서 처형됐다. 1983년 가족의 소청에 의해 재심한 결과 무죄가 판명되어 명예가 회복됐다”고 구체적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1986년 중국에서 발간된 <조선혁명열사전>을 인용한 것이다. 1989년 일본 아사히신문은 보충 취재를 거쳐 김산이 1938년 처형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로써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장지락이며, 그는 자신의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옌안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장지락이 옌안에서 처형된 것만 확인했을 뿐, 어떤 과정으로 처형돼 어디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여전히 많은 진보적 지식인과 언론이 장지락의 마지막 장면을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장지락에 대한 조그만 단서가 나오기라도 하면 ‘특종’이라는 이름을 달고 보도됐다. 베이징에 있던 중국공산중앙당교의 최용수 교수는 조선족으로 중국혁명과정에 기여한 많은 조선인을 발굴한 사람이다. 그는 중앙공산당 내부 자료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인 학자이기도 했다. 2005년 5월 23일 그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김산(장지락) 처형에 관계된 사람이 아직 생존해 있어 처형되는 과정과 처형된 장소, 묻힌 곳을 찾는 것이 남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아리랑>과 장지락에 관해 남아 있던 마지막 의문이었던 셈이다. 최 교수는 그러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아리랑>과 김산에 대한 관심은 뚝 끊어졌다.
김산 그리고 김찬과 도개손의 처형
2005년 경향신문은 앞서 최용수 교수를 통해 1939년 옌안에서 죽은 조선인 남자 김찬(金燦)과 중국인 여성 도개손(陶凯孙·타오카이순)의 국경을 넘는 사랑과 항일투쟁 그리고 옌안에서 나란히 죽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했다(‘70년 만에 햇빛 본 부부 항일투쟁’ 경향신문 2005년 5월 30일자). 이후 김찬의 활동상과 처형 그리고 복권 과정을 보완해 2015년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김찬·도개손 평전>이 나왔다. 이 책에는 김찬과 도개손 집안이 복권을 위해 중국공산당 핵심부를 통해 확인한 옌안에서의 이들 처형 절차를 자세히 기록했다.
책에 따르면 1938년 1월 산간닝비엔취((陜甘宁边区·산시성, 간쑤성, 닝샤성 3곳을 합친 곳) 정부의 사회부장 캉성(康生)은 중국공산당 기관지 <해방>에 ‘트로츠키 비적을 제거하자’는 글을 기고하며 연안파(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던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대숙청을 예고했다. 옌안에서 비밀스럽게 진행된 피의 숙청 절차는 산간닝비엔취 보안처 소속 탄정웬(潭政文)의 고문에 의한 수사, 보안처장 저우싱(周興)의 결재(동의), 산간닝비엔취 정부 서기 겸 보안사령부 책임자 가오강(高岗)) 최종 결재를 통해 완성됐다. 그리고 산간닝비엔취 부주석 가오쯔리(高自力)의 사형집행 결재 이후 옌안 북서쪽 안싸이현(安寨县) 쩐우동(眞武洞) 마자거우(馬家沟) 계곡에서 김찬과 도개손을 비롯한 연안파가 대규모로 총살돼 인근에 묻힌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이 모든 절차의 총책임자는 캉성이었다. 그가 기획하고 주도했다.
<조선혁명열사전>과 필자의 보충 취재 및 저서 내용, 그리고 김찬 아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1938년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과 김찬-도개손 부부는 거의 같은 시기 보안처에 연행된 것으로 보인다. 김산은 1938년 즉시 처형됐지만, 김찬은 중국공산당 고위층과 끈이 있던 부인 도개손 집안의 끈질긴 구명작업으로 사형집행이 1년여 늦춰졌다. 중국인 여성 도개손은 조선인 남편 김찬을 부정하면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같이 최후를 맞았다. 따라서 김산과 김찬-도개손 부부 등 연안파들은 옌안에서 같은 절차와 방법으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 개연성이 높다. 10월 초 필자를 비롯한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원이 이들 연안파의 마지막 행적으로 추정되는 옌안 안싸이현 쩐우동 마자거우 답사에 나선 배경이다. 여기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으로부터 옌안을 방어하던 팔로군 야전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홍성림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 회장이 중국 블로거를 검색해 이곳에 중국공산당 보안처가 구치소를 짓고 2~3년 동안 주둔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답사단은 마자거우 계곡에 사는 한 주민으로부터 “보안처가 있던 곳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가끔 동쪽 산속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얘기를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는 김찬-도개손 평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나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들의 ‘마지막 현장’에서 제사를 지내다
마자거우 계곡은 그러나 많고도 깊었다. 전시 야전사령부의 주둔지답게 험준한 산세에 천혜의 요새였다. 깊은 계곡에 띄엄띄엄 농가가 나타났다. 과거 팔로군이 사용하던 군 막사를 후에 농민이 개조해 사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차로 계곡을 헤매길 서너 시간, 산속에서 만난 한 농민이 옛 팔로군 병영이 남아 있는 곳을 알려줬다. 답사단은 아슬아슬한 계곡 한쪽에서 산간닝비엔취의 야전병원터를 찾을 수 있었다. 답사단이 마자거우 계곡에서 팔로군의 흔적을 마침내 찾은 순간이었다. 험준하지만 나름 안전하니 야전병원을 설치했을 것이다. 야전병원이 있는 행정구역의 정식 명칭은 황과탑(黃瓜塌)이다. 현지 안내판에는 그러나 황과탑(塔)으로 돼 있어 한참을 혼동했다. 한자로 탑(塌)은 움푹 들어갔다는 의미로 우리말로 치면 ‘골’쯤 된다. 그러니까 험준한 산속에서도 깊은 골짜기란 뜻이다.
답사단은 <아리랑>의 팔로군 야전병원 앞에서 험준한 마자거우 계곡을 향해 술을 한 잔 따르고 절을 했다. 아울러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주인공 김찬과 도개손에 대한 제사도 지냈다. 아마도 84년, 85년 만에 그들의 ‘마지막’ 현장에서 치러지는 첫 제사였으리라 생각한다. 김산의 경우 지방(紙榜)에 ‘항일혁명가 김산 신위’를, 김찬과 도개손은 ‘항일투사’로 썼다. 그리고 불타는 지방을 하늘로 뿌렸다. 지방은 재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답사단은 젊은 영혼들이 더 이상 마자거우 계곡에서 방황하지 말고, 하늘로 올라 평안을 찾으라고 기원했다.
답사단에 동행했던 연행노정(중국과 사신 교류) 아카이브 전문가인 신춘호 박사(영상아카이브연구중심 대표)가 팔로군 야전병원과 제사를 지낸 장소를 정확한 GPS 좌표로 기록했다. 이번 발굴이 수십 년간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서 의문과 토론 그리고 현장 답사의 대상이 됐던 <아리랑> 주인공 장지락의 마지막 행적이 정리되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한다. 학계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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