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론 도는 삼성…문제는 실적부진 아닌 ‘좁혀진 초격차’

옥기원 2023. 10. 3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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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없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1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0월 19일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를 찾아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취임 당시 반도체 사이클은 가파른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순탄하지 않을 ‘회장 1년차’를 업황이 예고한 셈이다. 보다 문제는 삼성의 주력 산업군 곳곳에서 ‘초격차’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다. 삼성 안팎에서 ‘위기론’이 나오지만 이 회장의 과단성 있는 메시지와 구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

메모리 산업 ‘만년 2등’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올 2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 1등’을 공언했다. 지난 20년 간 메모리 산업 경쟁력 가늠자였던 미세공정·수율 전쟁에서 삼성전자는 한번도 경쟁 사업자에게 밀린 적이 없다. 인공지능(AI) 반도체칩 시장의 절대 강자 엔비디아가 최우선 파트너로 지목한 곳도 하이닉스다. 삼성이 시장 예측 실패는 물론 기술 혁신 속도도 느려진 것 아니냐는 시장의 냉혹한 평가를 낳은 대표 사례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30일 “메모리 하강 사이클에서 삼성은 언제나 투자를 늘리며 경쟁 사업자와의 격차를 벌리는 전략을 폈다”며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 때 메모리 수요가 급증해 생산 투자를 늘렸는데 엔데믹 이후 수요 침체로 재고가 쌓였고, 이 시기 다른 부문(HBM 등)에 적기 투자를 못한 게 지금의 상황을 낳았다”고 말했다.

삼성의 또다른 캐시카우(현금창출원)인 스마트폰 사업은 미 애플과 중국 업체 사이의 샌드위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아이폰에 한참 뒤처졌고, 중저가폰 시장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추격이 매섭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600달러 이상 프리미엄폰 시장점유율은 애플 75%, 삼성전자 16%다. 저가 폰 위주인 중국 샤오미·오포·비보는 자국 수요와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올 2분기에는 시장점유율을 30%(중국업체 합산 점유율)대로 높이며 삼성전자(22%)를 앞질렀다. 수요 성장세가 가파른 인도 시장에서 중국 점유율은 55%(삼성전자 18%)를 웃돈다. 제품 경쟁력 두 축인 ‘기술’과 ‘가격’ 양 쪽에서 삼성 지위가 약해진 셈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젊은층의 아이폰 쏠림 현상을 ‘막연한 선망’이라고 치부하는 게 현재 삼성 임원들의 현실 판단이다. 메모리 수요 예측에 실패해 올 상반기에만 10조원에 이르는 적자를 내고도 업황 악화 등으로만 그 원인을 돌리는 모습에서 예전과 다른 삼성의 안일함을 느낀다”고 꼬집었다.

한겨레 그래픽

약점으로 꼽혀온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확대를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파운드리 점유율이 미미한 점을 염두해 두면 11.7%(올 2분기 기준)까지 지배력이 커진 건 괄목할만 한 성과다. 하지만 이 회장이 2019년 제시한 ‘2030년까지 1위 달성’이란 목표까지는 갈 길이 멀다. 삼성의 추격을 받는 대만 티에스엠시(TSMC)는 시장의 절반(56.4%)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인텔과 같은 경쟁 사업자의 파운드리 재진출을 더 치열한 공방을 예고한다. 4대 그룹의 한 전략담당 임원은 “삼성은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하면 누구보다 성과를 잘 내는 조직인데,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그게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룹 내 비주력 부문 계열사들도 고전 중이다.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삼성에스디아이(SDI)는 국내에선 엘지에너지솔루션을 넘지 못하고, 국외에서 중국 시에이티엘(CATL)·비야디(BYD)에 밀리고 있다. 건설과 상사 중심인 삼성물산도 영업실적 정체가 길어지고 있다. 생명보험업계 1위(수입보험료 기준)인 삼성생명도 ‘초회 보험료’에서 지난해 교보생명에 밀린 이후 올해 들어서도 뒤지고 있다.

이처럼 주력·비주력 계열사들의 초격차 지위가 흔들리고 있지만 이와 관련한 이 회장의 메시지나 구상이 외부로 드러난 적은 없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미-중 패권 경쟁을 비롯해 시장의 경쟁 구도가 전례없이 복잡해지면서 과거의 잣대로 오늘의 삼성을 평가하긴 어렵다”며 “환경 변화에 맞춰 적극적인 시장 공략과 이를 위한 투자를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삼성 임원은 “조만간 조직내 긴장을 불어넣을 메시지가 경영진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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