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우리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사 2023. 10. 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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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타들어 갈 듯하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다.

유난히 덥고 비가 쏟아지던 지난 여름을 상기해 보니 단연코 떠오르는 것은 냉면이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평론가 윤진섭에 의해 '단색화'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특유의 정신성과 행위성으로 주목받으며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 사조로 자리매김,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에서 비서구권으로 시선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루 평균 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한여름의 미술관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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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사

대지가 타들어 갈 듯하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가을이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을 즐기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유난히 덥고 비가 쏟아지던 지난 여름을 상기해 보니 단연코 떠오르는 것은 냉면이다. 그중에서도 평양냉면. 평양냉면 맛을 알아야 진짜 냉면 맛을 안다는 소위 '평냉부심'이 유행처럼 번져 지금은 대전에도 이름 난 맛집이 꽤 있다. 평냉부심자들에게 그 매력을 물으면 '슴슴하고 별맛 없는 것 같지만 집에 가서 누우면 생각이 나는 맛'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 평양냉면은 평양의 향토 음식으로 고려 시대 찬샘골의 한 주막집에 얹혀살던 달세라는 사위가 메밀국수를 삶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은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단색화는 한국 현대 추상화의 경향 중 하나로 일체의 구상성을 배제하고 한 가지 혹은 비슷한 톤의 색만으로 화면을 구성해 한국의 전통과 미학을 드러낸다. 1970년대 초반 서구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받아 태동하였으나 모노크롬과 달리 질감의 표현이 도드라지고, 자연미와 관계성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이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평론가 윤진섭에 의해 '단색화'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특유의 정신성과 행위성으로 주목받으며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 사조로 자리매김,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에서 비서구권으로 시선을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특정한 형태도 없이 단조로운 색으로 그려진 단색화를 이해하는 것이 대중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림이라 하면 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 또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경치를 떠올린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일체의 작위와 기교를 배제한 채 회화 고유의 본질을 보전하되 원숙한 형식으로 구현하는 명상적 세계를 경험해 볼 것을 제안한다. 마치 평양냉면의 그 슴슴한 맛처럼 말이다.

지난해 시작한 '이건희 컬렉션 근현대 미술 특별전' 순회에 힘입어 미술관은 유례없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루 평균 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한여름의 미술관은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그 뿐이 아니었다. 지난 9월 프리즈 서울 기간 내내 수많은 전시와 파티 등으로 서울의 낮과 밤이 떠들썩했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하나의 공동체로만 존재했던 미술계는 영화, 패션, 음식 등 다채로운 분야를 아우르는 시각 문화산업의 코어가 되어 새롭고 풍부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나 미술은, 전시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작품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이 간의 소통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미술의 동력이 작용하고 전시의 기능이 수행된다. 사실 그렇게도 열광한다는 단색화는 그 정의와 분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논쟁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누군가가 정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보는 대신 작품의 내용과 형식, 그 의미를 나름의 시각으로 분분한 찬미와 논쟁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벽에 걸린 작품을 보고 리플렛에 적힌 글을 읽는 대신에 말이다. 어색하겠지만 처음이라 그렇지, 며칠 뒤에는 괜찮아질 것이다. 평양냉면도, 단색화도.

우리원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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