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정지영 감독 "관객이 나를 버릴 때까지…"

손정빈 기자 2023. 10. 3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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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년들'로 돌아와…실화 3부작으로
"왜 실화냐고? 운명이 날 끌고 들어왔다"
"다만 내가 어디서 있는지 끊잆없이 확인"
정 감독 현장 막내까지 수평적 관계 유명
"내가 철이 없다, 내가 아직 어린 줄 알아"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글쎄요. 운명 같아요."

정지영(77) 감독의 새 영화 '소년들'은 '부러진 화살'(2012) '남영동1985'(2012)와 함께 정 감독의 '실화 3부작'으로 불린다. '부러진 화살'은 2007년 발생한 이른바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스크린에 옮겼고, '남영동1985'는 김근태 전 장관이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사건으로 구속된 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 당한 우리나라 현대사의 어두운 역사를 영화화 했다. 신작 '소년들'은 1999년에 벌어진 삼례나라슈퍼사건을 다뤘다. 모두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부당하게 행사된 공권력을 비판하는 작품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천안함 프로젝트'(2013) '국정교과서 516일:끝나지 않은 역사전쟁'(2017) 같은 작품을 기획·제작했다. 그래서 정 감독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사회파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에게 왜 또 실화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 왜곡된 부분을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냐고 물었다.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이런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 감독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저절로 그렇게 됐다." 그는 멜로 같은 걸 만들려고 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멜로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 영화도 시도 안 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만들어지지 못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선택이 안 되고 '소년들' 같은 영화만 선택이 되는 거예요. 운명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은 멜로 영화를 만드는 건 자신이 없긴 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삼례나라슈퍼사건은 전죽 완주 삼례읍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잠을 자고 있던 주인집 할머니를 살해하고 현금과 패물 등을 훔쳐 달아났다가 붙잡힌 사건이다. 강도들은 붙잡혀 각각 3~6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이때 재판을 받은 소년 3인은 진범이 아닌 경찰이 만들어 낸 가짜 범인이었다. 검찰과 법원은 이를 묵인했다. 사건 발생 후 17년이 흐른 뒤 진범이 나타났고, 세 사람은 재심을 통해 최종 무죄를 확정 받았다. '소년들'은 이 사건을 당시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던 '황진철'(설경구) 형사의 시점에서 재구성한다.


정 감독이 말한 운명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삶이라는 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고, 계획한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운과 우연이 사실상 모든 것이라고들 얘기하니까. 그러나 정 감독은 운명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운명을 얘기하면서도 삶의 태도에 관해서도 빼놓지 않고 말했다. 그 태도가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저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삶의 생명력이라는 건 자기 주체를 확고하게 가지고 갈 때 생기는 것이지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확인하고 싶어요. 그건 그냥 확인되는 게 아니잖아요. 과거를 돌아봐야 하고, 미래를 내다봐야 해요. 우리가 어디서 왔나, 어디에 있나, 어디로 가고 있나.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나와는 관계 없다는 듯이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삶과 사회를 향한 정 감독의 이런 진지한 태도 때문인지 영화계엔 그의 작품 활동을 지지하는 영화인이 많다. 정 감독은 이 작품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배우 설경구를 주인공 '황진철' 역으로 생각했다. 설경구는 시나리오를 읽어보지도 않고 정 감독의 제안을 받자마자 수락했다. 정 감독과 '블랙머니'(2019)를 함께한 조진웅은 정 감독이 특별출연을 부탁하자 망설임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진범 중 한 명을 연기한 서인국 역시 작은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정 감독의 제안을 큰 고민 없이 받아 들였다. 영화·드라마에서 단독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배우들이 정 감독 영화를 위해 합심했다. 그는 "나랑 일해본 배우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사실 모르겠어요. 제 연기 디렉팅이 설득력이 있었는지도 모르죠.(웃음) 그런데 제가 만든 영화가 실패하기만 했다면 배우들이 수락을 할까요. 그래도 잘 되는 작품들이 있으니까 받아들이는 것이겠죠. 아무튼 참 고마워요. 제가 인덕이 있나봐요.(웃음)" 정 감독 영화 현장은 감독과 배우·스태프가 수평적으로 관계 맺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막내 스태프와도 격의 없이 지내는 걸로 유명하다. 설경구는 이런 정 감독의 태도를 닮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제가 철이 안 들었어요. 나는 아직도 내가 어린 줄 알는 것 같아."

정 감독은 1946년생이다. 또래 중에 아직도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정 감독이 유일하다. 그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요즘 영화 트렌드를 여전히 연구한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건 물론이고 가방엔 아령을 넣고 다니며 운동한다. "제가 가진 콘텐츠가 트렌드에 따라서 변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감성이나 감각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까 그런 부분은 연구를 해야죠. 건강이요? 전 진짜 괜찮은데, 현장에서 자꾸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요."

10년 전에 은퇴를 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정 감독은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그런 그에게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 생각이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관객이 나를 버릴 때까지."

☞공감언론 뉴시스 jb@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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