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특집] "아들의 이 모습 보면 부모는 살아가기 힘드니 안 보시는게"

윤근영 2023. 10. 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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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ㆍ실종 고통딛고 좀더 나은 세상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김미숙ㆍ서기원ㆍ이계호ㆍ조윤환ㆍ이종락ㆍ전순옥…[삶]인터뷰이들
군인 시절 김용균과 어머니 [본인 제공]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자식의 죽음과 실종은 어느 정도 아픔일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다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의 고통일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고통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뒤에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다음은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이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의 사연을 묶은 것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미숙 [촬영 이건희]

[김미숙 김용군 재단 이사장 인터뷰]

김미숙(53)은 김용균의 어머니다.

남편, 아들과 함께 가끔 여행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노동 운동가가 됐다. 전국을 다니며 산재 사망 노동자 유가족의 손을 잡아주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강연도 한다.

그의 아들 김용균은 2018년 12월 새벽에 서부발전 컨베이어벨트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용균의 나이 24세였다. 발견 당시 그의 머리와 몸은 분리돼 있었다.

김용균은 한 달에 200만원 받는 비정규직이었다.

-- 용균이 사고 소식은 어떻게 접했나.

▲ 용균이는 2018년 12월11일 새벽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인 10일 용균이 밤 근무의 출근 시간 무렵인 오후 5∼6시께 용균이한테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그 이후 다시 전화했더니 반응이 없었다. 그때 암울한 느낌이 왔다. 무슨 사고가 날 것 같은 느낌, 사람이 죽기 전에 온다는 그런 느낌 같은 것이었다. 전화를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다음 날 오전 6시에 남편이 나에게 뛰어왔다. 남편은 예민한 성격이어서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용균이 맞는지 확인하러 오라는 내용이라고 했다.

시위에 참여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가 산재 추모의 날인 2023년 4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에 참가하고 있다.

-- 곧바로 태안으로 달려갔나.

▲ 우리는 아들이 크게 다쳤거나 의식을 잃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없이 열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태안의료원에 도착해서 응급실로 뛰어갔다. 그곳에 용균이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안실에 가서 인상착의를 말했더니 청년 한명이 들어왔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이 서랍장을 열었고, 석탄 분진으로 얼굴이 까만 청년의 얼굴이 나왔다. 머리카락과 피부를 만져봤는데, 용균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한 탓에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안경찰서로 가서 아들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부모가 자식도 몰라보느냐면서 경찰이 언성을 높였다. 우리 부부는 다시 태안의료원으로 갔다. 서랍장 속 청년의 눈썹을 보고 피부, 머리카락을 만져보니 더 이상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 그때는 아들의 머리가 몸과 분리된 사실을 몰랐나.

▲ 나는 용균의 손이나 몸을 만지려 했는데, 영안실 직원이 제지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목과 머리가 분리됐고, 부모가 그 모습을 보면 살아가기 힘드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영안실 직원들은 우리 부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데, 영안실 밖으로 쫓겨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복도에서 뒹굴면서 통곡했다.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니 보여달라고 했으나 그들은 문을 잠가놓고 열어주지 않았다.

-- 앞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 내가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이렇게는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4년간 보고 느낀 것이 있고, 알게 된 것이 많은데 어떻게 모른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이 길이 쉽지는 않다. 자식 잃은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야 하고, 그 사고를 되새김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운동을 할지 확답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서기원 대표 [촬영 이건희]

[서기원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 인터뷰]

서기원(60)은 20대에 남부러운 것이 없는 부자였다.

젊은 나이에 여러 사업체를 운영해 평생 먹고살 만한 돈을 벌었고 국회의원,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의 인생은 31세 때인 1994년 외동딸 희영(당시 만10세)의 실종 사고를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아이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2008년부터는 실종아동찾기협회 대표를 맡아 실종아동 관련 제도를 개선하려고 노력해왔다.

-- 희영이 실종 당시 정황은 어떠했나.

▲ 희영이는 당일 오후 3시쯤 보습학원에서 외갓집으로 돌아온 뒤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외갓집은 우리 집에서 주택 몇 채를 사이에 두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희영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는 첫 손주여서 예쁨을 많이 받았고, 시집을 가지 않은 이모들이 3명이나 있어서 외갓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놀이터는 외갓집에서 10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희영이는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 희영이 실종 소식은 언제 들었나.

▲ 나는 내 소유의 골프연습장 수리 공사 현장에 있었는데, 희영이 이모한테 전화가 왔다. 오후 5시쯤이었다. 희영이가 가방을 두고 놀러 나갔다가 안 들어오니 (우리) 집에 들러 희영이가 자고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는 승용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봤으나 희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근처의 다른 놀이터도 모두 찾아봤지만 희영이는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도 달려가 봤으나 마찬가지였다.

서기원 대표와 딸 희영이 [본인 제공]

-- 경찰에 곧바로 신고했나.

▲ 사안의 심각성을 직감한 나는 곧바로 역전 파출소로 달려갔다. 우리 희영이가 안 돌아온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뭐 어디 가까운 데 갔겠죠. 어디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겠죠"라고 쉽게 말했다. 나는 "희영이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이건 사고가 난 것"이라고 했으나 그들은 우선 기다려보자고 했다.

-- 밤이 돼도 희영이는 오지 않았나.

▲ 오후 8시가 되어도 희영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을 차 몇 대에 나눠 태워서 사방으로 찾으러 다녔다. 광한루를 비롯해 아이가 갈만한 데를 돌아다녔지만 희영이는 없었다. 나는 잠을 자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학교에 가봤으나 희영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희영이를 찾지 못했다.

-- 앞으로 계획은.

▲ 실종 부모들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고, 그분들 가정이 회복됐으면 좋겠다. 이를 위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교수 [촬영 이다빈]

[이계호 교수 인터뷰]

이계호(70) 교수는 태초 먹거리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깊은 아픔이 있다. 14년 전인 2009년에 딸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유방암으로 숨졌다. 수술한 지 3년 만에 온몸으로 전이됐다.

그는 딸을 살리기 위해 전 세계의 논문을 뒤졌다. 민간요법으로 생존한 암 환자가 있으면 세계 곳곳에 직접 찾아가 배웠다. 지인들이 특효약이라고 알려주면 뭐든지 시도해봤다.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딸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후회되는 일 두 가지가 있다. 딸이 표준적 치료를 마친 후 1년 정도의 면역력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이를 모르고 복학을 막지 못한 점, 특효약과 민간요법을 찾고 적용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한 점이었다.

딸을 보낸 그에게 이런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는 암 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2010년 태초 먹거리 학교를 세워 그들을 대상으로 무료 건강 교육을 시작했다.

-- 건강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 딸이 25세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왜 암에 걸리는지, 암을 예방할 방법은 없는지, 재발을 막을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 딸은 언제 발병했나.

▲ 서울에 있는 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 다니던 딸이 22세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딸은 수술을 비롯한 표준치료를 신속히 끝내고 곧바로 대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딸의 빠른 복학을 막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 역시 복학해도 된다고 했다.

가을철 태초 먹거리 학교의 모습 [본인 제공]

-- 복학한 이후에 또 문제가 생긴 것인가.

▲ 딸은 이전 생활로 되돌아갔다. 졸업작품을 만드느라 밤을 새웠고, 제대로 먹지도 않았다. 취업 준비를 하느라 동영상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면접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렇게 딸은 졸업했지만,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것이 확인됐다. 복학을 늦추고 1년 정도의 면역력 회복 기간을 가져야 했는데 의사도 그런 이야기를 안 했고, 나도 그걸 몰랐다.

-- 전이된 후에 치료는 불가능했나.

▲ 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의과대학의 공부를 독학했다. 전 세계 암 병원의 치료 방법을 다룬 논문을 파고들었다. 전 세계에서 병원이 포기한 암 환자가 민간요법으로 나았다고 하면 직접 그곳에 가서 그 방법을 배워 딸한테 시도했다. 불행히도 물거품으로 끝났다.

-- 본인 삶의 목표는

▲ 딸이 하늘나라로 가면서 내 삶의 목표는 바뀌었다. 그전에는 돈을 버는 것이었다. 워낙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딸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먹고 살고 성공하려 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됐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절망 상태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것이 내 삶의 마지막 목표가 됐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윤환 [촬영 이건희]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 인터뷰]

조윤환(44)은 33년간 고아로 살았다.

6살 때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다가 39세였던 2018년에 부모님을 찾았다. 한 살 위인 그의 누나도 비슷한 시기에 서울역에 버려졌다. 누나는 목포의 보육원에서, 동생은 부여의 보육원에서 각각 자랐다.

그는 지난 2018년 고아권익연대를 만들었다. 어려움에 빠진 고아들을 경제적, 정서적,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부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 고향은 어디인가.

▲ 태어난 곳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자란 곳은 부여의 한 보육원이다.

-- 부여의 보육원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 엄마가 나를 서울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렸다. 나는 경찰서와 대방동 임시아동보호소를 거쳐 부여의 보육원에 가게 됐다.

조윤환 어릴 적 사진 [본인 제공]

--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버려졌을 당시를 기억하나.

▲ 6살 때였다. 엄마와 함께 천안 외할머니댁에 며칠 머무른 뒤 서울 집에 가기 위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엄마는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를 모셔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엄마는 오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엄마가 나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벌을 주는 줄 알았다.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엄마 동전에도 손을 안 대고, 엄마가 주는 옷을 그대로 입고, 편식하지 않겠으니 한 번만 엄마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울고 또 울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밤이 돼서 경찰이 나를 데려갔다.

-- 찾아온 경찰관한테 뭐라고 했나.

▲ 울면서 엄마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나의 손을 잡고 터미널을 한 바퀴 돌고는 엄마가 없으니 이제는 가자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터미널 내 한구석에 숨어서 나를 계속 지켜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경찰관이 나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터미널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 경찰관이 오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나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 버려질 것을 사전에 전혀 몰랐나.

▲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신호가 있었다. 내가 평소에 야구복을 사달라고 떼를 많이 썼지만, 어머니는 절대로 사주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천안 외가에 내려갈 때는 갑자기 야구복을 사줬다. 나는 그 옷을 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외가댁에 갔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나를 버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부여 고아원에서 조윤환(가운데) [본인 제공]

-- 누나가 있다고 하던데.

▲ 한살 위의 누나가 있다. 누나는 내가 버려지기 직전 서울역에 유기됐다. 지금도 그때가 기억난다. 어머니는 누나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갑자기 서울역에 가보자고 했다.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서울역 주변을 한 바퀴 돌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경찰관이 내 손을 잡고 고속버스터미널을 한 바퀴 도는 것과 같았다. 나름대로 찾아봤다는 인상을 나에게 주기 위한 형식적인 행위였다.

-- 누나도 보육원으로 갔나.

▲ 누나는 서울역에서 껌팔이 등을 시키는 사람들에 의해 열차에 태워졌다. 누나는 목포에서 승무원에 의해 발견됐고 그곳에 있는 보육원에 들어갔다. 나는 부여, 누나는 목포에서 각각 살게 된 것이다.

-- 고아권익연대의 목적은 무엇인가.

▲ 이 단체를 해체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고아들이 없어지고, 보육원이 사라지면 이 단체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런 세상이 오도록 활동하고 있다. 고아가 없어지면 노숙자도 줄어들고 무연고 사망자도 감소할 것이다. 노숙자와 무연고 사망자의 상당수는 고아 출신이기 때문이다. 국제연합(UN)도 보육원은 좋지 않은 곳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만,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당장 보육원을 없애면 고아들이 갈 데가 없어지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 점차 없애야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종락목사 [촬영 이건희]

[이종락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 인터뷰]

이종락(69) 목사는 지난 2009년 베이비박스를 만들고 지금까지 운영해온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았다. 학교 다니기 싫다며 고교를 중퇴했고, 술을 안 마시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입이 거칠었으며, 노는데 집중했다. 농촌에 살면서 모를 심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멍석말이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1987년 아들 은만 씨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자신의 전신마비 아들 은만이도 보살피기 어려운데, 중증 장애 아이들을 비롯해 많게는 19명의 아이를 직접 자기 집에서 키웠다. 그리고 베이비박스를 통해 2천여명의 아기를 받아 보호했다.

아들 은만씨는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은만씨가 본인 삶에 영향을 줬다고 하던데.

▲ 1987년에 은만이는 얼굴 크기의 혹을 얼굴에 달고 태어났다. 마치 얼굴이 두 개인 듯했다. 그 혹은 임파선염 때문에 생긴 것이었는데. 곧바로 악성으로 변했다. 태어난 지 4개월이 됐던 어느 날 아이의 열이 41.9도까지 올라갔다. 그때 시신경과 고막이 파손됐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이미 호흡이 끊어진 상태였다. 의사들은 심폐소생술을 하다 포기하려 했으나 나는 울면서 다시 한번 시도해달라고 매달렸다. 기적적으로 아이는 다시 숨을 쉬게 됐다. 그러나 뇌세포가 죽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걸어 다닐 수도, 밥을 스스로 먹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었다. 은만이는 14년간 침대에 누운 채 병원 생활을 했다. 우리 부부와 첫째 지영이 등 가족은 아예 병원 침대 밑에서 생활했다. 은만이는 2019년 33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은만이를 통해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종락목사의 아들 은만씨의 임종 [본인 제공]

-- 중증 장애 아이들 여러 명을 데리고 살게 된 계기는.

▲ 은만이가 입원했던 병원의 옆 병실에 상희라는 아이가 있었다. 전신 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아이의 외할머니가 나를 보자고 했다. 83세의 그 할머니는 사흘간 나를 유심히 살펴봤다면서 자기 손녀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기는 멀지 않아 세상을 뜰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와 언니는 정신 지체자였고, 아이 아빠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이를 맡아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열심히 전도하는 내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 식구는 계속 늘어나 19명이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 지금까지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기는 몇 명인가.

▲ 베이비박스가 2009년 12월 만들어진 이후 올해 7월까지 2천101명의 아기가 보호됐다. 2016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아기가 부모 상담과 함께 맡겨졌다. 상담률은 2020년 이후 98% 정도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해야 할 일도 적지 않다.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다. 더 진실하게,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전순옥 [촬영 이건희]

[전순옥 전 국회의원 인터뷰]

전순옥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오빠의 분신 사망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아 졸도했다.

이후 어머니 이소선(작고)과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든 그는 1977년 9월 9일 청계 노조의 노동 교실 되찾기 투쟁에서 4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투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2년 만에 귀국한 그는 노동운동 관련 일에 계속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성공회대 교수, 민주정책연구소 부설 소상공인정책연구소장,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의원 등을 지냈다.

--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

▲ 단성사 아래 양복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점심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분신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었다. 오빠가 분신자살한 줄은 전혀 몰랐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니 오빠 친구 김영문이 찾아와 오빠가 많이 다쳤다며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2005년 전태일 기념상 제막식에서 이소선 여사 [연합뉴스 자료 사진]

-- 오빠가 분신 이틀 전인 11일 밤에 집에 왔었는데, 분신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안 했나.

▲ 나는 눈치를 전혀 못 챘다. 당시 나는 야간 중학교에 다녔는데, 옷 공장에서 일하는 것으로는 학교 월사금을 모두 내지 못했다. 12일 아침에 오빠가 옷을 챙겨 입고 나가기에 같이 밥을 먹던 나는 쫓아 나가서 "오빠, 학교 월사금 언제 줄 거야?"라고 물었더니 오빠는 나의 등을 두들겨주면서 "며칠만 기다려주면 오빠가 꼭 해줄게"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오빠와 헤어졌다. 오빠한테 그런 말을 한 것이 철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도 너무너무 미안하다.

-- 어머니 이소선은 자기 머리털을 팔아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전태일에게 줬다고 하는데.

▲ 오빠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한테서 들었다. 젊은 시절 공장파업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노동운동은 위험하니 나서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으나 오빠는 듣지 않았다. 오빠는 어머니한테 근로기준법 책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고, 어머니는 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돈을 줬다. 어머니는 나중에 그 일을 크게 자책하셨다. 자신이 그 책을 사줘서 아들이 죽게 됐다고 생각한 것이다.

-- 본인이 원하는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 나는 독일식, 핀란드식 사회민주주의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런 나라에도 양극화는 있다. 가난한 사람이 있고 노숙자도 있다. 그렇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자기 분야에 노력했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대우받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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