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m 9초대 진입 전에는 은퇴 안 할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김국영(32)에게 2023년 가을은 꿈같이 지나갔다. 지난 3일 자신의 네 번째 아시안게임 무대인 중국 항저우 대회 남자 400m 계주에서 국제 대회 사상 처음으로 시상대에 올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15일 목포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치른 전국체육대회 100m에선 내로라하는 후배들을 제치고 4년 만에 왕좌를 되찾았고, 17일 남자 일반부 계주에서 광주시청 동료들과 대회 신기록을 일궈내며 2관왕에 올랐다. 그는 11월에는 멀리뛰기 국가 대표 출신인 김규나(33)와 화촉을 밝힌다. 김국영은 “어쩌면 최악의 시즌이 될 뻔했는데 이번 가을바람이 최고의 시즌을 만들어 준 것 같다”고 했다.
-아시안게임 메달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지는 않았지만, 시상대에 서니 기분이 좋았다. 육상 단거리에서 태극기 한번 휘날리는 게 이렇게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 나눌 시간도 없이 시상식 후 숙소 들어가서 라면으로 끼니 때우고 짐 싸고 공항으로 이동해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와서도 집에 짐 풀고 부모님하고 밥만 먹고 헤어져 차 타고 목포 내려와서야 눈을 붙였다. 딱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메달 목에 거니까 힘들어도 견딜 만했다. 못 땄으면 정말 피곤했을 것 같다.”
-네 번째 아시안게임에서 첫 메달인데.
“100m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아시안게임에 못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연맹에서 400 계주 대표로 기회를 주셨다. 단거리 대표 7명 중 아시안게임을 뛰어 본 사람이 나뿐이었다. 메달 따는 게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맏형으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도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자기 최고 기량을 펼쳐야 나도 기분 좋게 대회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달 준비하는 동안 후배들 몸 관리 세밀하게 체크하려고 애를 썼고, 쓴소리도 많이 했다. 아이들이 내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여주고, 마음을 잘 받아들여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7명 중 3명은 뛰지 못한다. 실망하거나 불만스러울 수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 2개월 준비하는 동안 잡음 안 생기도록 최선을 다했다. 후배들에게 ‘누가 뛸지 아무도 모른다. 나도 열외가 아니다’라며 선의의 경쟁을 이끌었다. 예선 끝나고 결승 전날 멤버 조정이 있었는데, 예선에서 뛴 선수 한 명이 빠졌다. 분위기가 안 좋을 수도 있었는데, 그 선수가 고맙게도 ‘형들이 멋있게 달려 메달 따줄 거라고 믿기 때문에 기분 좋게 응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예선 성적이 전체 2위였다. 오히려 대신 뛴 선수가 굉장히 부담 많이 갖고 뛰었을 것이다. 피니시라인 통과 후 전광판에 NR(National Record)이란 단어가 떴다. 자세히 보니 타이기록(39초85)이었다. 경기 후 후배들에게 ‘하늘이 우리에게 메달을 내려주셨는데 신기록은 안 주셨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 같다’고 말했다.”
-아시안게임이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3년 뒤 내 나이가 만 서른다섯이다. 내가 국가 대표로 선발됐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단거리 육상이 발전안 했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내가 아시안게임 못 나가는 것보다 더 슬플 것 같다. 후배들이 나를 끌어내려 계주조차 선발되지 못하게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막연한 기대라기보다는 후배들을 믿는다. 이번에 보니 다들 현재 실력 이상으로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나도 더 열심히, 잘 뛰었던 것 같다.”
-자신을 밀어낼 후배들은 있는가?
“이번 아시안게임에 같이 출전한 이재성은 100m, 고승환은 200m에서 무궁무진한 재능을 갖고 있는데, 아직 100% 펼쳐내지 못한 것 같다. 그들과 훈련하면서 내 경험을 들려주고 조언해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한국 육상이 세계 수준으로 오르려면 외국으로 많이 나가야 한다. 사실 우리가 한 단계 발전하는 동안 다른 나라는 두세 단계 발전한다. 이번 아시안게임 100m에서 9초94로 우승한 중국 선수는 미국의 세계적인 지도자가 가르친다. 직접 중국에 못 오니 태블릿을 이용해 원격 코칭을 하더라. 다른 나라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이번에 메달을 땄으니 연맹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금 고교생인 조엘진 선수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나는 혼자 외롭게 뛰었는데 요즘 선수들은 선의의 경쟁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라이벌이 있어야 기록도 빨라지고 수준도 높아진다.”
-국제 대회 첫 입상을 했다.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
“내가 2010년 고(故) 서말구 선생님의 한국 기록(당시 10초34)을 깨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그때는 10초 벽 깨는 게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그런데 10년 넘게 못 깼다. 한국 기록을 다섯 번 깼으나 그것도 2017년이 마지막이다. 내가 뭘 하나 해야 하면 못 하면 못 배긴다. 그동안 수많은 좌절을 겪었지만. 아직도 9.9초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서른 하나인 작년 6월에도 10초09 한 번 뛰었는데, 올해 대표 선발전에서 다치니까 이제 회복이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런 말 신경 쓰지 않는다. 내 꿈을 향해 묵묵히 달릴 뿐이다. 앞으로 최대 2년 동안 모든 것 쏟아보겠다. 후회나 미련 안 남도록 달리겠다.”
-그 목표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방지다. 지금 가장 후회스러운 게 2017년 승승장구하던 때다. 왼쪽 종아리를 다쳤는데 빨리 9초대를 뛰고 싶다는 조급함 때문에 운동을 안 멈추고 계속 달리고 훈련했다. 그때 운동 쉬고 충실하게 재활했다면 이미 9초9의 세계에 도달해 있지 않았을까. 2017년 부상 이후 다리를 아기 다루듯 한다. 내 생명이니까. 슬리퍼 절대로 안 신는다. 발목 돌아가거나 계단 내려갈 때 넘어질 수도 있다. 훈련 후 다리가 약간만 쑤셔도 곧바로 파스 붙인다. 부상이 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를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기에 물려도 다리에 스트레스 주는 것 같아서 안 긁고 그냥 놔둔다. 가까운 거리는 대중교통 이용하고, 장거리 운전할 때는 크루즈컨트롤 쓴다. 오래 자동차 타면 항상 산책해서 다리 풀어준다. 마사지에 절대로 돈 안 아낀다.”
-내년엔 파리 올림픽이 열리는데.
“올림픽 기준 기록이 10초00이다. 사실상 9초대로 뛰어야 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빨리 뛰는 선수가 더 많아졌다. 지금 우리 단거리로선 쉽지 않다. 지금까지 내 선수 생활을 돌이켜보면 국제 대회에 나갈 때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히려 그런 게 계속된 실패를 만들어냈다. 생각만 했지, 더 잘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면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100m에 출전한 후배들에게 이번에 실패하면서 느낀 기분을 절대로 잊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어떡하면 더 잘 뛸까 연구하고 노력할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리우 올림픽 때 처음 출전했고, 도쿄에서 2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는데 1년 연기되는 바람에 못 뛰게 됐다. 당시 세계 랭킹으로 출전 자격이 됐다. 그런데 코로나로 국내에서 아예 경기를 치르지 못해 랭킹이 기준 밖으로 떨어졌다. 기준 기록을 통과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안 됐다. 이번 아시안게임도 작년엔 선발전을 통과했는데 1년 미뤄졌고, 결국 부상으로 탈락했다.
-11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비 신부가 고생 많이 했다. 결혼 준비에 엄청 바쁠 시기에 난 아시안게임 때문에 선수촌에 머무르면서 외박도 안 됐으니까. 다행히 작년에 프로포즈한 다음 겨울에 미국 훈련 가기 전 어느 정도 결혼 준비를 하고 나가서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다. 11월 결혼하고 신혼여행 일주일 갔다 오면 올림픽 체제로 국가대표 소집 훈련을 하게 될 거다. 그래도 예비 신부가 정말 나를 많이 배려해 주고 이해를 많이 해준다. 원래 올해 은퇴하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선수 생활을 더하기로 했다. 이번 아시안게임 동메달과 함께 9초대 기록을 선물하고 싶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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