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관찰해야만 물건의 진가를 알아챌 수 있는 곳... 37년째 '장돌뱅이 사진가'가 기록한 장항선 장터

이혜미 2023. 10. 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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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 발간한 정영신 작가
지난해 충남 아산 온양온천역 인근에 열린 풍물오일장. 역 앞으로 나오면 광장이 보이고, 광장 너머 장항선 고가철도 하단부에 장이 열린다. 정영신 작가 제공

스스로를 '장돌뱅이(보부상) 사진가'라 칭하는 이가 있다. 바로 37년째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오일장을 모두 기록한 정영신(65) 작가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장터가 없지만, 그는 아직도 장터를 갈 때면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그립고 설렌다고 한다. 배낭에 카메라와 시집 한 권, 수첩과 필기도구, 생수 한 병 챙겨 놓고 훌쩍 떠나는 정 작가의 이번 여행지는 '장항선' 일대의 장터들이다.

장항선은 충남 천안시 천안역과 전북 익산시 익산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이다. 과거 일제의 군사적 목적과 물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노선이다. 근대화와 제국주의의 수탈을 상징하던 노선이지만, 이 길을 따라 생명력 넘치는 민중의 삶은 꽃피었다. 물건을 내다 파는 장꾼들과 가계를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시골의 지역경제를 이루는 근간인 '장터'를 형성했다.

천안역에서 충남 서천군 장항역까지 사이 스물한 곳에서 오일장이 열린다. 천안역에는 거봉 포도로 유명한 '입장장' '성환장' 그리고 독립운동의 텃밭인 '아우내장'이 있고, 삽교역에는 곱창으로 유명한 '예산 삽교장'이 열린다. 홍성역에는 '홍성장' '갈산장', 대천역에는 '보령 대천장' 장항역에는 '서천 장항장' 등이 있다. 가까운 거리에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과, 세계의 온갖 공산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대형마트가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충남 서천 특화시장에서 만난 장꾼 할매가 만 원을 받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정영신 작가 제공

최근 사진집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눈빛 발행)'을 출간한 정 작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여정"으로 장항선 장터 여행을 택했다고 했다. 코로나19 이후 챗GPT니, 메타버스니 하는 최신 기술로 모두가 디지털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에 불편함을 느꼈다. 후덕한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 길로 장터가 열리는 충남 내포 지역으로 향했다.

"장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물건을 사고팔 때 묘한 신경전을 목격해요. 100원, 500원에 얼굴 표정이 달라지죠. 그런 찰나를 보는 게 재밌어서 사진을 찍어요."

그가 처음 장터를 찾은 건 1980년대 후반이다. 신춘문예에 낙선한 뒤 사람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장터가 떠올랐다. 아무나 가도 되고, 사람 이야기가 흘러넘치며,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현대의 급속한 변화 속에 이제는 장터에도 사람이 없고 쓸쓸함마저 감돌지만, 그가 장꾼들을 만나며 채록한 이야기와 카메라로 담은 사진들로 인해 비로소 장터는 다시 생기를 얻는다.

책에는 장터 할매들이 펼친 난전의 농산물 사진을 비롯하여 장터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농촌의 한적한 들판 풍경 등 느려서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득하다. 호박, 쪽파, 열무, 고추, 가지, 여주, 마늘, 배추, 도라지 등 오랫동안 사람들의 밥상을 책임졌던 작물들은 마트의 매끈하고 평균적인 맵씨와 대조적으로 울퉁불퉁 개성 있게 생겼다. 봄이면 산나물 하나를 사는 데도 할매들의 '봄나물 강의'가 덤이다. 예산역전장의 한 할매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낸 사과 두 알을 내놓았다. 장터에서는 모든 물건이 소중하고 낭비가 없다.

"시장의 물건들은 모양새도 다르고, 물과 흙에 따라 물건들도 제각기죠. 할머니들이 봄부터 씨 뿌려 물 주고 애써 기른 물건은 나물 하나, 호박 하나만 봐도 달라요. 느리게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거죠."

장터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풍경들. 정영신 작가 제공

책은 점점 사라지는 장터와 이 공간을 메운 장꾼들을 향한 연서다. 옛날에 보았던 풍각쟁이, 원숭이와 함께 나온 약장수의 익살스러운 농담에 환하게 웃는 사람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장터를 찾을 때마다 "우리 죽으면 이 장도 없어지고 주차장 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정 작가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번화했던 과거는 옛말이고, 장꾼 서너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는 경우도 왕왕 있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켜야 하는데 내가 죽으면 이 장은 누가 지키나' 하는 마음으로 늙은 몸을 이끌고 꿋꿋하게 장꾼들은 가져온 물건을 내어놓는다.

"어르신들이 장에 나오는 건 세상을 만나러 오는 거래요. 장사는 '일'이 아니라 '삶'이고, 나를 살리는 일이라고요. 지금 장항선은 느린 열차가 달리지만, 5년 후에는 KTX처럼 고속 열차가 달릴 거래요. 장항선이 없어지기 전에 이 장터들에 가서 이야기도 나눠보면서 시골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는 건 어떨까요."

1987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정영신 작가는 한국의 시골 장터를 기록해오고 있다. 정영신 작가 제공
혼자 가본 장항선 장터길·정영신 지음·눈빛 발행·224쪽·2만5,000원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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