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한령·검열 뚫고… 中 최대 갤러리 채운 한국 작가
전광영, 한국인 최초 개인전 열어
한지(韓紙)가 중국을 사로잡았다. 지난 25일 베이징 798 예술구에 있는 탕 컨템퍼러리 아트 전시장. 삼각형 조각들이 화폭에 촘촘히 부착돼 돌기처럼 튀어나온 작품 앞에서, 20대 중국 여성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얼핏 보고 그림인 줄 알았더니 작은 조각들을 캔버스에 붙인 방식이고, 종이에 한자가 적혀 있어서 무슨 뜻일까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했다.
‘한지 작가’ 전광영(79) 개인전 ‘임계의 차원’이 이곳에서 한 달간 열렸다. 아시아 최대 규모 갤러리인 중국 화랑 탕 컨템퍼러리 아트가 베이징 메인 전시장에서 한국 작가 개인전을 연 것은 처음이다. 1997년 방콕에서 출발해 베이징, 홍콩에 이어 지난해 서울에도 지점을 연 탕 컨템퍼러리 아트는 최근 본사를 방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세계시장에 통하는 아시아 작가들을 중국 내에 소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 시작이 고서(古書)를 활용한 한지 조각으로 세계적 명성을 일군 작가 전광영이다. 지난 9월 28일 개막해 29일 끝난 전시는 작가가 2003년부터 올해까지 만든 ‘집합’ 연작 21점을 선보였다. 중국의 유명 큐레이터 펑보이가 전시 기획을 맡아 화제가 됐다. 펑보이는 “관심 있는 작가라 의뢰가 왔을 때 바로 수락했다”며 “전 작가 작품은 색채를 다양하게 쓰고, 종이에 한자가 적혀 있어 중국 관객들이 친근하면서도 호기심을 갖고 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전광영은 한지를 모으고, 묶고, 그 위에 스케치하고, 점을 찍는 방식으로 독특한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1995년 봄, 감기 몸살로 약을 먹으려 약봉지를 바라보다가 어린 시절 큰아버지의 한약방을 떠올렸다. 한지로 감싼 뒤 끈으로 묶은 약봉지가 한약방 천장에 매달려 있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기억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옛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고서의 낱장을 찢어 삼각형 스티로폼을 싼 후 끈으로 묶어 한약방 약첩 형태로 만든다. 적게는 수천개, 많게는 수만개 조각을 정교하게 박아놓고 때로 돌출시켜 만든 거대 조형물을 서구에서 먼저 알아봤다. 2018년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벨기에 브뤼셀, 러시아 모스크바에 이어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 전시로 대규모 개인전을 열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번 전시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도입부에선 한지를 천연 염료로 염색해 그러데이션을 넣거나 빨강·파랑 등 원색으로 포인트를 준 신작들을 걸었다. 뒷부분은 무채색이지만 더 강렬하고 입체적이다. 펑보이는 “지구에서 달 표면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어떤 미지의 행성을 보는 느낌을 준다. 황량하고 참혹한 전쟁 같기도, 인간의 상처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며 “전쟁과 가난을 겪은 작가의 내면이 드러난 것 같다. 신작에선 화사한 색채 작품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긍정까지 담아냈다”고 했다.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탕 컨템퍼러리 아트 한동민 팀장은 “작품이 먼저 베이징에 도착했지만, 중국 정부 검열이 심해서 종이에 왜 한자가 적혀 있는지, 무슨 뜻인지 일일이 물었다”며 “작품에 들어간 고서 이미지를 찾아서 족보와 논어, 소학이라는 걸 보여주고, 정치적 의미가 없다는 걸 증명한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전광영 작가는 “작가에겐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중국 본토의 심장인 798 예술구에서의 전시는 내게 또 다른 시작의 의미”라고 했다. 다양한 각도로 작품을 감상하던 관람객 뤼옌옌(45)씨는 “가까이서 보니 종이에 한자도 있고 한글도 보인다. 문화 간의 만남과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펑보이는 “한국 전통을 가진 한지를 활용해 평면과 입체로 다양하게 시도한 작품들이 중국의 현대 화가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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