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 이름 한 자씩 딴 문학관… 문인 자료 3만점 담은 우리 문학 寶庫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2층. 작년 세상을 떠난 고(故) 이어령 선생이 지내던 서재 창가엔 앙상해진 덩굴식물이 남아 있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책 6400여 권, 컴퓨터 7대를 비롯한 서재를 그대로 보존했지만, 잎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고인의 아내 강인숙(90) 영인문학관 관장은 “이어령 선생이 기르던 풀이다. 저게 사는 걸 보면서 ‘마지막 잎새’처럼 여겼는데, 많이 떨어졌다”며 생각에 잠겼다. “특히 올해 떠나가는 분들이 많네요. 오탁번, 최일남, 김남조.... 떠나간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요.”
영인문학관은 한 부부의 삶이 담긴 ‘집’이면서, 한국 근현대문학의 ‘보고’(寶庫)다. 이어령 선생과 강인숙 관장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2001년 개관했다. 강 관장은 “정말 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걸 막으려 시작했다”고 했다. 1969년 이어령 선생이 한국문학연구소에서 춘원 이광수 유품 전시를 연 이후, 그 물건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것이 계기였다. “개인이 하기엔 (유품 보존이)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죠. 박완서 선생은 아이가 다섯 명이라, (아이 낳은 뒤 시어머니가 쌀을 씻은) 바가지가 다섯 개였어요. 여분이 있으신 듯해서 사정해서 받아왔죠.” 강 관장은 “한국엔 가족이 안 하면 (기록이) 없어진다. 모윤숙 선생의 경우 따님이 해외에 있어서 출판이 어려웠다”라며 “가족이 아니어도 물건을 보존할 수 있는 기구가 이제는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문학관에 모은 물건이 이젠 3만여 점이다. 그사이 수많은 문인이 이곳을 거쳐 갔다. 강 관장은 16년여 전, 손정아 공예가가 선물한 목걸이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초록색 옥이 섞인 돌에 유치환의 시 ‘작약꽃 이울 무렵’의 일부를 새긴 것이다. “문학관에 자주 오시던 분들 중 한 분이 ‘예쁜 돌이 있는데 시를 새겨주겠다’고 제안하셨어요. 돌 값만 내고 받았죠. 귀중한 우정이 담긴 물건입니다.” 영인문학관 곳곳엔 이런 문인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31일까지 열리는 ‘문인들의 일상 탐색 2023′전에는 이달 세상을 떠난 김남조 시인을 기리고자, 초를 비롯한 그의 물건을 전시했다. “김남조 선생은 휠체어를 오래 타며 몸이 좋지 않으셨는데도, 한 번도 안 빠지고 전시회에 와주셨어요. 올해 전시에 처음으로 못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란 갈 때도 챙긴 정지용 시집 초판본
강 관장의 삶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새 생명을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그는 “첫아이를 1959년 낳고 1년 지나니까 4·19 혁명이, 그다음 해엔 5·16 군사정변이 있었다. 아이가 세 살 될 동안 총소리를 두 번 들은 것”이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1933년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1945년 월남한 그가 처음 총소리를 들은 건 6·25 때다. “하루는 천안 인근에서 자고 일어나니, 눈이 사람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더군요. 무릎까지 차는 그 눈을 뚫고 갔습니다. 발이 얼진 않았어요. 사람이 참 질기죠.” 문학 소녀였던 그는 피란 당시 짐 가방에 정지용 시집 ‘백록담’ 초판본을 챙겼다. “1·4후퇴 이전 자료는 제게 그것 말곤 남아 있지 않아요. 쌀을 들고 가도 될까 말까인데, 시집을 챙겨가니 어머니에게 엄청 야단맞았지요(웃음).”
서울대 국문과에서 만나 1958년 결혼한 이어령·강인숙 부부의 시작은 성북구 단칸방이었다. 에세이 ‘글로 지은 집’(열림원)에서 그는 당시를 “남편이 한구석에서 밤을 새우며 글을 쓰면, 아내와 아이는 불빛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이라고 썼다. 수차례 이사를 거쳐 지금의 영인문학관 자리에 집을 지은 것은 1974년. 아이 셋을 길러야 했고, 이 선생뿐 아니라 강 관장도 건국대 등에서 문학을 가르쳤기에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강 관장은 “세상에 나서 내가 가장 기뻤던 해는 이어령 선생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1974년이었다”고 회상했다.
지상 2층, 지하 2층 규모의 영인문학관에 강 관장의 서재는 3평 남짓이다. 35평 규모의 지상 2층은 이어령 선생의 서재이고, 같은 크기의 지상 1층엔 가족의 생활 공간 겸 강 관장의 서재가 있다. 강 관장은 “제 방은 완전히 창고”라며 “1980년대부터 (이어령 선생이 세운) 문학사상의 원고를 우리 집에다 채워 왔다”고 했다. “지금도 방에 귀한 자료를 보관해둡니다. 가습기를 쓰고, 바닥도 따뜻하니 관리가 가장 잘되고 돈도 적게 들죠. 제가 큰 방을 쓰려면 이어령 선생의 서재를 줄이든지, 문학관을 줄이든지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어요. 주방 식탁이 제 일터입니다.”
유년시절 배운 한글, 문학 토대로
강 관장은 196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문학평론가. 그의 문학적 토대는 일제강점기 일본어를 사용하다, 해방 이후 한국어를 사용하게 되던 시대에 있다. “한글을 집에서 배웠기 때문에 국민학교 때 다른 친구들보다 제 독해력이 좋았어요. 그때는 한 반에 한글을 네댓 명밖에 몰랐습니다. 물론 고등학교 때는 소설에 빠지면서 경쟁에서 손을 놨지만요.” 염상섭의 자연주의를 주제로 1984년 쓴, 원고지 1400여 쪽 분량의 박사 학위 원고는 일본, 프랑스, 한국의 언어와 문학을 두루 아는 배경에서 탄생했다. 여러 차례 이사를 거치면서 자신의 원고를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이것만은 간직해 왔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자연주의가 아니라, 1인칭 사소설 위주의 일본 자연주의에서 영향을 받았죠. 염상섭을 자연주의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를 죽기 전에 바꾸는 것이 제 가장 큰 고민입니다.”
강 관장은 1953년 대학 때 만든 것을 비롯해 압화를 여럿 간직하고 있다. “순간을 멈추고 싶은 기분이 드는 때가 있어요. 좋은 책을 읽었거나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특별히 감성적일 때, 압화를 만듭니다. 재작년 이어령 선생 건강이 괜찮으실 때는, 식사를 하고 나와 빨간 잎사귀로 압화를 했었죠. ‘내년에도 이 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인터뷰를 한 지난 25일은 부부의 결혼기념일(10월 23일) 이틀 뒤였다. 기자에게 책을 선물하며 ‘10월 25일’이란 사인을 건네던 강 관장은 “예전엔 10월 24일이 UN의 날이었다. 안식년이 없던 때라 하루라도 더 쉬려고 결혼식을 23일에 했다”며 이 선생과의 과거를 추억했다. “이 선생 돌아가시면서 정리할 게 많아 너무 바빴지만, 이제 거의 대강 끝났어요. 이 선생 인터뷰 전집 교정을 보는 것 정도이고, 제 전집을 마무리해 하던 일을 끝내고 싶습니다.” ‘이어령의 아내’와 ‘영인문학관 관장’ 중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어떻게 기억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둘 다 내 현실이고,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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