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카르텔이라고 쓰면 뭐라고 읽어야 하나!

윤부현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 2023. 10. 3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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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부현 부산대 생명과학과 교수

지난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은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연구개발)는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일부 인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특정 세력이 연구비를 나눠 먹는 소위 연구비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뜻이었다. 이 발언의 후폭풍은 매우 거셌고, 과학계는 혼돈에 빠졌다. 내년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16% 이상 삭감되었다. 1991년 이후 처음으로 연구비가 삭감된다고 하니, 경험해 보지 못한 변화에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도전은 차치하고라도 한창 진행 중인 연구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젊은 연구자들의 고용은 더욱 취약한 처지로 내몰릴 것이다. 과학계에서는 비교적 조용히(!) 한탄도 해보고 하소연도 해보지만, 정부는 별 반응이 없다. 연구자들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이 문제가 공론장에서 더 치열하게 다뤄지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 삭감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연구개발 카르텔이란 것이 있어서 그들끼리 연구비를 나눠 먹는 행태가 문제라고 했지만, 그것이 왜 예산 삭감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30조 원 규모의 연구비 어디에서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분석 없이 예산 삭감에만 집중했다면, 마구 휘두른 칼과 다르지 않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 더 정연한 논리와 깊은 철학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해진다.

삭감을 주도했던 분들이 이유를 속 시원하게 얘기해 주지 않으니, 내 마음대로 ‘상상’하게 된다. 우선 한국 과학자들이 생산해 내는 과학 지식의 규모를 살펴봤을 것이다. 연구비가 지원된 분야마다 놀랄 만큼 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 현황을 보다가 ‘적정 과학’의 필요성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역량이나 국제적 위상을 냉정하게 진단해 그에 걸맞은 정도의 과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말이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명적인 연구, 지구와 우주를 인식하는 새로운 관점, 인류를 모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도전적 연구 등에 대한 현실적 회의가 들었을 것이며, 과학 지식 창출에 들어갈 돈과 노력을 보다 가시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쪽으로 돌리기로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의 선순환적 관계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과학에 대한 지지는 경제적 기대감에서 출발했고, 과학이 경제발전과 국익의 밑거름임을 ‘산업화 시대’를 통해 경험적으로 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사는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성장의 역사와 일치한다. 이번 연구비 삭감 결정의 ‘진짜’ 원인을 상상해 보면, 정부는 이제 과학을 경제성장의 도구로만 인식해 온 ‘낡은’ 틀에서 벗어나 패러다임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과학을 다루려는 것 같다. 기술 패권이나 5차, 6차 산업혁명을 위해서라면 매년 더 많은 예산으로 더 많은 과학기술을 연구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앞으로 덜 고통스럽게 살아남는 일에 더 많은 과학기술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는 판단 말이다.


정부는 이처럼 과학의 쓸모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검토를 거친 뒤에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한 것이라 믿고 싶다. 다만 너무 급진적으로 보일까 봐 다른 이유를 내세웠으리라. 그러나 연구개발 예산 삭감이 세수 부족으로 인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는 문명사적 결단이라면, 카르텔과 같은 말로 문제의 본질을 가리지 말고 과학정책의 철학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어떨까. 연구를 수행하고 과학 지식을 만드는 돈의 상당 부분은 국민의 세금이다. 따라서, 경제·행정·정치와 같은 사회 활동과 무관한 ‘가치 중립적 과학기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과학자들은 현재의 시대 상황에 맞는 사회적 대화의 과정을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다. 과학계 호소가 왜 정부의 깊은 고민의 결과를 뒤집을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면 과학계도 수긍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대체 어떤 과학이 얼마나 필요한가. 이런 토론을 통한다면 예산을 깎는 쪽도 더 당당하고 깎이는 쪽도 덜 억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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