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76> 부산박물관 소장 만공단비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부산박물관 조선실에는 반 정도 깨져 상단 부분만 남은 비석이 전시돼 있다.
비석에는 '만공(萬公)'이란 한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그다음에는 본래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1834년 동래 화가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에는 '만공단'이라고 적힌 비석이 그려져 있고,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의 부산진지도에도 만공단이 표시돼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부산박물관 조선실에는 반 정도 깨져 상단 부분만 남은 비석이 전시돼 있다. 비석에는 ‘만공(萬公)’이란 한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그다음에는 본래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연 얼마나 중요한 유물이기에 일부만 남은 것을 이렇게 전시하는 것일까?
이 비석의 이름은 만공단비(萬公壇碑)이다. 만공단(萬公檀)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장군 만세덕(萬世德)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09년(숙종 35) 부산진성에 세운 제단이다. 임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 부산진성에는 왜군을 몰아낸 만세덕과 그 휘하 명나라 군대가 이곳에 잠시 주둔한 것을 기념해 그들의 활약을 칭송한 만세덕 기공비(萬世德 紀功碑)가 세워진 바 있다.
그러나 이후 파손·방치되고 있었는데, 이를 본 동래부사 권이진이 조정에 건의해 수리해서 세우고 그 옆에 새롭게 만공단을 지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는 만공단비는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만공단은 옛 그림과 글에 종종 등장한다. 1834년 동래 화가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에는 ‘만공단’이라고 적힌 비석이 그려져 있고, 1872년 제작된 지방지도의 부산진지도에도 만공단이 표시돼 있다. 또한 조선 후기 무신 유상필이 1811년 대마도를 다녀와서 쓴 사행기록인 ‘동사록’과 조선 후기 학자 홍직필의 시문집인 ‘매산집’에도 만공단에 올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전차 선로 부설, 매축 등으로 부산진성 성문과 성벽, 건축물, 비석 등이 크게 훼손될 때 만공단도 그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5년 완료된 부산진성 정화복원공사에도 만공단비와 기공비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0년 7월 ‘국제신문’ 기사에 만공단비가 등장한다. 한 시민의 제보로 만공단비가 반파된 채 부산진성공원 진남대 앞 화단 경계석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인근 최영 장군 사당 뒤쪽 축대 하단에서는 또 다른 비석의 머릿돌인 이수(螭首)가 발견됐다.
발견된 만공단비는 반쪽만 남아 있고 이수는 어느 비석의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만세덕 기공비는 아직 행방이 묘연한 점이 여러모로 매우 아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는 한 가닥 희망을 얻었다. 바로 화단 경계석으로 묻힌 비석이 문화재임을 알아보고 알린 시민이 있었다는 점. 이 시민이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글과 그림으로 상상만 하던 만공단비를 오늘날 실제로 볼 수 있었을까. 여러분의 작은 관심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또 다른 문화재를 구할 수 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