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치어리더인가 여론조사대표인가
“트럼프 취임식에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렸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전(前)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은 가짜 뉴스로 유명하다. 미 언론들은 8년 전 같은 장소에서 찍힌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 사진을 보여주며 백악관의 거짓말을 반박했다. 캘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이 변명을 하려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이란 유명한 말을 한 것도 이때다.
이 일로 사람들이 설문조사에서 얼마나 거짓말을 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이 하나 촉발됐다. 미 성인 남녀 1388명에게 트럼프와 오바마의 취임식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고, 어디에 사람이 많은지 고르라고 했다. 사진엔 아무 설명 없이 A·B만 표시했다.
여기서 트럼프 투표자의 무려 15%가 오답을 냈다. 곳곳에 빈 공간이 확연한데도 틀린 답을 한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기들 눈으로 본 것도 믿지 않는다”는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정치학자들 분석은 좀 달랐다. 실험을 주관했던 브라이언 샤프너 당시 매사추세츠대 교수는 “정치적 치어리더(응원꾼)들이 설문조사를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표현 수단으로 삼았다”고 했다. 설문 응답자들 중 일부가 사진과 질문의 의도를 알아보고 일부러 거짓 응답을 했다는 것이었다. 설문조사에 특정 정파 지지층이 개입해 만들어내는 이런 ‘역선택’은 이후 미국 뿐 아니라 여러 나라 조사업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떠올랐다.
최근 한국조사협회가 정치여론조사에서 ARS(자동응답조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이 직접 통화하는 전화면접과 달리 ARS는 ‘정치 고관심층’이 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한다. 그냥 끊어도 되는 ARS에 응할 정도면 상당한 정치적 관심과 자기 의견을 반영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진 맹렬 지지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요즘 ‘세월호 고의 침몰설’ 등을 주장했던 김어준씨까지 여론조사 회사를 차려 유튜브 조회수를 올리고 있다. 회원 구독료(월 1만원)가 재원인데, 그는 자신들이 전화조사와 ARS 둘 다에 돈을 많이 쓴다면서, “비싼 게 정확하다”는 말을 마치 사람들 세뇌하듯 반복한다.
여론조사는 흔히 국 간을 보는 행위에 비유된다. 솜씨 좋은 요리사는 국 솥을 휘휘 저어 재료가 잘 섞이게 한 뒤, 조금만 맛을 봐도 100명 1000명이 먹을 음식 간을 기막히게 맞춘다. 부분(표본)으로 전체(모집단)를 추정하는 설문조사의 원리다. 조사 회사들이 지역·연령별 응답자 기준을 정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최소 세 번 다시 건다든지 같은 세세한 규칙을 만드는 것과 같다.
한데, 만약 요리사가 문제라면? 아무리 간을 잘 봐도 요리사 의도에 따라 나오는 음식과 맛이 다 다를 것이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에 따라 물어보는 내용과 질문 방식도 차이가 난다. 특히 요즘 김씨가 발표하는 조사를 보면 경기 화성시을(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성남시 중원구(더불어민주당 윤영찬), 부천시을(더불어민주당 설훈) 등 이른바 민주당 내 비명계를 솎아 내야 하는 특정 지역구들이 유독 눈에 띈다. 여기에 미국선 15% 수준이지만, 우리는 더 높을 수도 있는 ‘개딸’류 지지자들의 역선택이 섞여 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또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된 80~90개 업체가 쏟아내는 조사들까지 뒤섞여 다시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되먹임’ 현상도 예상된다.
이런 조사를 얼마나 믿어줘야 할까. 어떤 이들에게 여론조사는 과학적 여론 측정이 아니라, 정치적 치어리딩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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