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14] 어려운 고백
2000년대 초 한 월간 잡지 연재를 준비 중이었다. 원고 내용은 재래시장을 순례하면서 상인들을 인터뷰하고 그걸 에세이로 쓰는 거였다. 들뜬 나는, 카메라와 취재 수첩까지 마련했다. 혹한(酷寒)의 겨울날이었다. 첫 취재지로 시흥시의 한 재래시장을 찾았다. 이 가게 저 가게를 옮겨 다니며 얘기를 채집하다가 일찍 해가 졌는데,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은 지 오래된 점포가 좌우로 늘어선 골목을 발견했다. 소설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흰 토끼를 쫓아서 이상한 나라로 접어들듯 어둠의 입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길 끝에서는 한 노파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앉아 조그만 좌판 위의 떡을 팔고 있었다. 퓨전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초현실적 장면이었다. 그런 데서 떡이 팔릴 리도 없고, 얼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노파는 25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해왔기에 그러고 있을 뿐이었다.
인터뷰 중에 내가 물었다. “어느 대통령 때 가장 살기가 좋았어요?” 당시 나는 급진적 좌파였다. 내 머릿속에는 내가 확신하는 정답이 있었다. 나는 원하는 대답을 정해놓고 질문하는 나쁜 인터뷰어(interviewer)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상상도 못 하던 대답으로 나를 파괴했다. “전두환 때는 사람들이 저기 골목 끝까지 줄을 서서 떡을 사 갔지. 그 시절에 이 자리에서 장사한 거로 아들 둘을 대학 공부 시켰어.”
귀가하는 나는 혼란하고 심란했다. 전두환 5공 독재 시절은 당연히 온 국민이 고통에 치를 떠는 시대여야 했다. 그런데 저 노파는 정반대로 말하지 않는가. 나는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아무 이유도 대지 않은 채 연재를 하지 않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전두환과 5공 좋은 얘기라서 싫었던 것이다. 그나마 거짓을 쓰지는 않은 게 용하지만, 그 일은 내 마음에 두고두고 ‘작가적 부정직의 상처’로 남았다.
이제 이십여 년 만에 내가 내게 입힌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 작은 글을 쓴다. 나는 지금도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5공의 어둠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식하고 잊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 때문에 역사와 사회, 인간과 국가를 깊고 넓게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대는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 김영삼, 김대중 시대도 누군가에겐 그랬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비판하되 그들의 공적은 깨끗하게 인정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실증한 다음에야 비로소 역사와 대화를 나누는 정직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악용해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동학란(東學亂) 유공자까지 있는 미친 나라를 만들려 한다. 그 할머니는 돌아가셨겠지. 나는 부끄러움을 간직한다. 진실을 외면하는 ‘가짜 작가’가 또 되긴 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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