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에 항의했던 ‘대구 10월항쟁’ 아십니까?

백경열 기자 2023. 10. 3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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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주년 맞아 시민연대 모임 발족
유족들 “진상규명·명예회복 요구”
대구 10월항쟁 유족들이 지난 25일 대구 달서구 10월항쟁 전시회에서 전시물들을 둘러보고 있다.

대구 10월항쟁 유족인 채성기씨(75)는 지난 25일 대구의 한 전시관에서 부모님의 흑백사진과 자신의 현재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나란히 인쇄된 전시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는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10명과 유족의 인물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채씨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10월항쟁 때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에는 피해를 볼까 두려워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고 말했다. 채씨를 비롯한 유족 10여명이 이날 사진전을 찾아 기억을 곱씹었다.

10월항쟁 유족회는 지역 시민단체 등과 함께 31일 항쟁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10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모임’을 정식 발족한다고 30일 밝혔다. 10월항쟁 77주년을 맞아 유족과 지역 시민단체 등이 상설 연대회의를 만들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로 한 것이다. 유족회는 10월항쟁을 알리기 위해 ‘그해, 10월’이라는 이름의 사진전 등의 행사를 진행 중이다.

10월항쟁은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진 대규모 시위다. 미 군정의 식량 공출 정책에 항의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후 미 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강경진압하면서 그해 12월까지 전국으로 시위가 퍼졌다.

항쟁의 여파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들 상당수가 한국전쟁 직후 재판 절차도 없이 희생됐다. 이들은 오랫동안 ‘관제 빨갱이’로 낙인찍혔지만, 1987년 민주화와 함께 폭동이 아닌 항쟁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대구 10월항쟁 등 6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10월항쟁 유족회는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한 명확한 진실규명을 첫 과제로 꼽는다. 국가의 책임 있는 배상과 보상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해 발굴 및 추모공원 조성,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역사교과서 기술 등도 뒤따라야 한다는 게 유족회의 입장이다. 유족회는 10월항쟁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노력도 절실하다고 말한다.

유족회에 따르면, 현재 10월항쟁 당시를 기억하는 유족은 3명만 남아 있다. 모두 아흔 살이 넘는다. 유족회는 피해자의 2세도 대부분 70대인 만큼 이들이 생존해 있을 때 녹취 등을 통해 증언자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결정할 때 위령·추모사업, 희생자 공적기록 정정, 진실규명 내용 등재, 평화·교육 강화 등을 지자체에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현재 대구시 차원에서 10월항쟁을 기리기 위한 별도의 정책이나 행사 등은 전무하다. 매년 10월 올리는 합동위령제에 대한 대구시 지원은 기존 1000만원에서 올해 700만원으로 30% 삭감됐다. 채영희 유족회장은 “10월항쟁 시발점이 대구이지만 정작 대구시는 시민에게 이를 알리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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