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인간보다 더 ‘사람’다운 이태원
인간은 과연 사람인가? 바보 같은 질문 같지만, 지구상의 다양한 인간들을 만날 수 없던 시절 피부색과 외모가 다르며, 언어가 다른 종족을 만나면, 사람의 자격을 묻고는 했다. 비서구 지역을 탐방한 인류학자의 기록 속에는 ‘사람’의 의미가 ‘인간’을 초월한 사례가 많다. 실제로 바위, 나무, 곰, 그리고 번개마저도 ‘사람’이라 불리기도 했다. 즉, 사람이 되기 위해 인간과 꼭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태철학자 유기쁨 박사(<애니미즘과 현대세계>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이 아닌 것에 사람을 애써 발견하려는” 자세가 사람의 중요한 특성이다. 상호작용하며 자극을 받고 관계를 맺은 대상을 ‘사람’이라 상상하고 반응하는 존재가 곧 사람으로 여겨졌다. 즉, 사람의 조건은 스스로가 사람임을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사람으로 상상하고 대우할 때 그때 비로소 사람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음식도, 옷도, 집도, 그리고 다른 인간 모두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며 관계를 맺을 때, 나 역시 비로소 사람의 자격을 얻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조차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종교적 상상력을 ‘애니미즘’이라 불러왔다. 영국 사회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원시문화>의 저자)는 비서구 지역에서 관찰되었던 이러한 종교적 특징을 미개한 원주민만의 독특한 문화적 산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인류 종교의 본질이라 여겼다. 즉,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해주는 그 모든 대상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사람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근간이라 보았다.
159. 어느덧 이 세 자리 숫자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2022년 10월29일 직전까지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그곳을 찾는 젊은 세대들에게 인간보다 더 ‘사람’다운 곳이었을지 모른다. 2000년 전후에 태어나 이미 2014년 세월호참사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어온 젊은 세대는 ‘재난 세대’라 불릴 정도로 부모 세대와 다른 삶을 살아왔다. 그런 이들에게 이태원은 불안한 미래와 끝 모를 경쟁 구도에서 짐을 내려놓고 편견 없이 ‘사람들’ 속에서 ‘사람답게’ 숨 쉴 수 있는 축제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학벌과 능력으로 인간을 등급화하는 장소에서 벗어나 서로의 사람됨을 애써 찾아내려는 환대의 공간. 이태원은 그렇게 사람답지 않은 인간사회보다 더욱 사람다운 곳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부에선 159명의 안타까운 희생을 여전히 개인의 탓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 눈에는 ‘이상적인’ 희생자다움의 기준선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희생자 모두를 연령, 성별, 국적, 방문 목적을 구별하지 않고 애써 사람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상실되어 있다. 차별 없이 모두를 환대했던 이태원, 반대로 자신들만의 잣대로 희생자를 구별 짓기 했던 인간들, 이 둘 중 누가 더 사람다운 것인가.
인류학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준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오랫동안 질문해 왔다. 영국 의료인류학자 세실 헬만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평가할 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x축)과 ‘통제됨’과 ‘통제되지 않음’을 가르는 선(y축)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 분석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네 개로 구분된다. 정상적이며 통제되는 ‘정상적인’ 행동, 정상적이나 통제되지 않는 ‘나쁜’ 행동, 비정상적이나 통제되는 ‘상징적 반전’ 행동, 비정상적이며 통제되지 않는 ‘미친’ 행동이 있다.
여기서 상징적 반전 행동이 나타나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축제와 카니발이다. 평상시에는 비정상적 행동도 축제의 시공간에서는 통제 속에 허락된다. 인류 역사상 소위 ‘통제된 비정상성’의 시공간은 사회적 긴장감을 해소하는 치유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2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 격리에서 벗어나 핼러윈 축제를 위해 대규모 인파가 1년 전 이태원에 모였을 때 그들은 어떤 통제를 경험했던가.
분명 그곳에는 통제가 있었다. 경찰력은 정상적 시민들이 통제 불가능한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며 불법 근절을 위해 통제력을 행사했다. 반대로 질서유지를 위해 통제력이 절실했던 곳에서는 후퇴했다. 누군가의 눈에 축제 인파는 이미 정상적이지도 통제가 가능하지도 않은 나쁜 인간, 미친 인간들이었을지 모른다. 이태원과 그곳을 방문한 모든 이들로부터 ‘사람됨’을 빼앗아간 1년. 다시금 사람의 조건을 되묻고 싶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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