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작전 [만물상]
당 태종은 고구려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성 앞에 거대한 토산을 쌓았다. 완공을 코앞에 두고 토산이 갑자기 무너졌다. 고구려가 토산 밑에 굴을 판 뒤 지하수를 흘려 기반을 허물었다는 설이다. 땅굴은 고대부터 공성전(攻城戰)에 등장했다. 굴을 파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몰래 성안으로 침투했다. 투석기와 불화살 공격을 피해 성안에도 땅굴을 팠다. 땅굴을 막으려고 지하수를 흘려 넣고 불과 연기를 지폈다. 독일군도 2차 대전 때 지하에 숨은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려고 굴에 대량의 물을 퍼부었다.
▶태평양 전쟁 때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은 땅굴에 매복한 일본군에 발목이 잡혔다. 굴마다 수류탄을 던져 넣고 화염방사기를 쏘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끝까지 저항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6·25 때 중공군은 휴전선 일대에 총길이 5000㎞의 땅굴을 팠다. 공습을 피하고 병력을 이동시키는 지하 만리장성이었다. 미군은 밤낮으로 폭격했지만 끝내 파괴하지 못했다.
▶미군은 베트남전에서도 땅굴에 고전했다. 초대형 폭탄을 투하해도 밀림 깊숙이 자리 잡은 땅굴은 무사했다. 당시 한국군은 땅굴 주변 주민과 베트콩을 분리시켜 보급로를 끊었다. 땅굴 입구에 연막탄을 피워 연기가 오르는 곳마다 철판으로 틀어막았다. 결국 베트콩들은 연기와 허기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산악 동굴에 애를 먹은 미국은 땅굴 전투 교범과 유·무인 복합 부대를 만들었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정찰 드론과 소형 로봇이 땅굴에 먼저 진입한다. 땅굴 구조와 부비 트랩, 매복병의 위치를 파악하면 자폭 드론이나 특수부대가 이를 제거한다. 특수 재머(전파 방해 장치)로 상대 자폭 장치를 무력화하고 섬광탄으로 시각을 마비시킨다.
▶하마스와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 가장 큰 복병은 가자지구에 미로처럼 얽힌 500㎞ 땅굴이다. 이스라엘은 야할롬·사예렛 매트칼 등 땅굴 부대를 투입했다. 이들은 수십 개의 입구와 적 지휘부(개미집)를 발견하기 위해 휴민트·위성·감청 정보를 총가동한다. 입구가 발견되면 연막을 불어 넣고 연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개미집엔 벙커버스터를 꽂아 넣는다. 지상 출입구는 녹색 거품 폭탄으로 틀어막는다. 땅굴 내부를 진공화하는 방법도 있다. 산소를 일시에 빨아들이는 폭발물로 지속적 발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최루가스 등 화학물질도 투입한다. 보급로를 차단한 뒤 물·음식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고사 작전도 쓴다. 그래도 완전 공략은 어렵다. 21세기에도 땅굴이 유효한 이유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