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대입 ‘3차 대전’을 예고하는 수능 개편안

이범 교육평론가 2023. 10.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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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대학 간 격차가 크고 ‘경쟁의 자기장’이 강하다. 이런 환경선 난도·복합도가 높을수록 부담과 사교육이 는다
대학과 장관이 연합하여 복합도를 다시 높이고 있다. 학생들 입장에선 철인5종 경기가 철인10종 경기로 대체되는 셈이다
‘정시는 곧 수능 100%’라는 사회적 합의의 전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훼손할 게 아니라, 철학을 드러내며 사회적 토론 제기해야 한다

지난 10월10일 발표된 2028학년도 대입 개편안에는 내가 ‘예상 가능했던 부분’과 ‘예상 불가능했던 부분’이 섞여 있었다. 일단 예상 가능했던 부분을 살펴보자. 일각에서는 수능에 논·서술형 문항이 도입될 것이라고 내다봤으나, 나의 예상대로 개편안에서 빠졌다. 논·서술형 도입의 걸림돌은 사교육이다. 한국 학생들에게 논·서술형은 객관식보다 어렵게 느껴지고, 더 많은 ‘개별 지도’를 요구한다. 따라서 논·서술형 시행은 사교육업계에 대형 호재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대입시험은 객관식 없는 논술형이다. 하지만 이를 한국에서 행할 때 벌어질 사교육 대란을 감당할 정치세력은 한국에 없는 것 같다.

한편 내신이 9등급에서 5등급으로 변경되긴 했지만 어쨌든 상대평가가 유지되었다. 이 또한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사실 내신 상대평가는 학생이 과목을 선택하는 제도(고교학점제)와 상충한다. 상대평가를 하면 선택과목 간 유불리가 발생하여 학생들이 특정 과목(예를 들어 물리·경제)을 기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구 선진국에서 예외 없이 내신을 절대평가(등급제)로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내신 상대평가의 문제는 과목 선택을 왜곡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학교라는 소집단에서 제로섬 상대평가를 하다 보면, 체감 경쟁강도가 극대화된다. 옆자리 친구가 직접적인 경쟁 상대로 인식된다. 반면 우리는 직장에서 옆자리 동료와 ‘경쟁’하기보다 ‘협력’한다. 경쟁은 대체로 개인 간이 아니라 조직 간(기업 간 혹은 국가 간)에 벌어지며, 조직 경쟁력을 높이려면 조직 내부에서는 경쟁보다 협력이 필요하다. 즉 내신 상대평가는 경쟁 스트레스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인성이나 노동윤리 형성에도 마이너스다.

고교학점제, 출발점부터 중대 결함

이처럼 심각한 단점을 가진 내신 상대평가가 왜 지금껏 존속했을까? 1990년대 후반부터 몇년간 내신을 절대평가로 매긴 적이 있었다. 이때 대입 실적을 높이기 위해 이른바 ‘내신 부풀리기’가 일어났다. 당시 담당 장학사는 강남 지역 고교에서 중간·기말 고사를 극히 쉽게 출제해 무려 90% 이상이 ‘수’를 받은 경우를 회고한다. 고교학점제를 계기로 내신 절대평가가 도입되면 이런 일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이뿐 아니다. 내신 상대평가는 고교별·지역별 학력 격차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일정 비율에 1등급을 준다. 따라서 고교별·지역별로 골고루 뽑히는 ‘균등 선발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이 절대평가로 바뀌면 특목고·자사고 경쟁률이 치솟고 강남 집값이 뛸 것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2014년 고1부터 내신을 절대평가로 변경하겠다고 예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시행 6개월 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아 상대평가를 유지했다. 이는 특목고·자사고 쏠림, 강남 쏠림을 우려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고교학점제 적용을 앞두고 반복된 것이다. 이로써 고교학점제는 출발점부터 중대한 결함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수능 논·서술형 미도입, 내신 상대평가 유지는 예상 가능했던 범위였다. 그렇다면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선택과목이 제2외국어만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교육부 발표 자료를 보면 수능 상대평가의 문제점으로 “특정 과목 쏠림”이라든가 “어떤 과목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다른 표준점수를 받게 되는 것” 등을 정확히 진단한다. 이에 대한 정상적 해법은 수능에서 상대평가 지표(석차등급, 표준점수)를 없애고 절대평가 및 원점수 또는 균등화 보정점수(scaled score)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대입시험에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한국 교육당국은 엉뚱하게도 이 같은 ‘정석’을 외면하고 선택과목을 없애버리는 ‘꼼수’를 택했다.

이제 수능 과학·사회 범위는 고1 과목(통합과학·통합사회)으로 한정된다. 6차 교육과정 수능(1999~2004학년도)과 유사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고2·고3 때 배우는 과학·사회 과목들 중 하나를 추가 선택했다. 반면 이번 개편안에서는 과학·사회에서 선택과목이 완전히 배제되었다.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획일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기서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철학과 노선을 따져봐야 한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수석, 차관, 장관을 거치며 교육정책을 이끌었다. 이명박 정부의 대선 공약은 ‘대입 자율화’였고, 그는 “입학사정관제가 성공하면 많은 교육 문제가 해결되는 만큼 가장 우선순위에 두겠다”면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입학사정관제는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 대입 정원의 0.07%(254명)를 선발한 일종의 ‘시범 사업’이었는데,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에는 13.5%에 달했다. 얼핏 그리 높지 않아 보이지만 상위권 대학에서는 비율이 20~30% 수준이고, 서울대·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은 80%를 넘었다. 입학사정관제는 이후 박근혜 정부 시절 학교 밖 활동을 제외하는 방향으로 개편되며 명칭이 학종(학생부종합전형)으로 바뀌었고, 학종은 2018년 대입 공론화를 통해 비교과 영역을 상당 부분 삭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시전형의 복합화 예견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것은 당시 이주호씨가 입학사정관제만 도입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수능 영향력 약화를 시도했다. 일단 수능을 쉽게 출제하여 그 전에는 드물었던 만점자가 2012학년도에 갑자기 30명이 되었고, 이 흐름은 이후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아울러 수능 과학·사회 선택과목을 최대 4개에서 3개로, 다시 2개로 줄이도록 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0개로 만든 것이다. 지난해 장관 지명 이전에 그가 “수능이 없어져야 마땅”하며 자신이 “수능 폐지론자”라고 공언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수능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관치’를 최소화하고 ‘대학의 자율’을 높이는 방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수능으로는 고2·고3 때 배우는 과학·사회의 성취도를 알 방법이 없다. 이 부분은 내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수능 성적에 내신 성적을 ‘합산’해야 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서울대는 이미 지난해부터 정시전형을 수능 100%가 아니라 내신을 자체 기준으로 변형하여 20% 합산하는 방식으로 개편했다. 고려대도 올해부터 정시전형 일부를 수능과 내신을 함께 반영해 선발한다. ‘정시전형은 곧 수능 100%’라는 도식이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축소되고 기형화될 수능을 빌미 삼아, 더 많은 대학이 정시전형에서 수능뿐 아니라 내신도 보겠다 할 것이다. 심지어 학생부에 잔존하는 여러 정성평가 항목(교과활동, 종합의견, 자율활동, 동아리활동·봉사활동 일부)까지 심사하려 할지도 모른다. 정시전형의 복합화, 어쩌면 ‘학종화’가 예견된다.

나는 대학 자율과 학종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존중한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불길하다. 21세기 들어 한국은 대입과 관련하여 2차례 대전(大戰)을 치렀다. 1차 대전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8학년도 정시전형에서 수능, 내신, 논술 등 3가지를 합산하는 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정시전형을 거의 수능 100%로 만들어 해소했다. 2차 대전은 2018년 대입 공론화 과정에서 수시와 정시, 학종과 수능 사이에 벌어진 공방이다. 이는 정시전형 정원을 일정 수준 늘리는 선에서 타협되었다. 이때 정시전형이란 당연히 ‘수능 성적만으로 선발’을 의미했다. 그런데 서울대·고려대가 이 전제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수능과 내신을 합산하기 시작했다. 이번 수능 개편안은 여기에 추가적인 강력한 명분을 제공한다.

한국은 대학 간 격차가 크고, 그로 인해 ‘경쟁의 자기장’이 강하다. 이런 환경에서 전형 요소들이 어려울수록(‘난도’) 그리고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합산할수록(‘복합도’) 부담과 사교육이 늘어난다. 1차 대전의 트라이앵글과 2차 대전의 학종은 모두 ‘복합도’가 높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교과에서 나타나는 ‘불공정’에 가려 주목을 덜 받았을 뿐이다. 이제 대학과 장관이 연합하여 복합도를 다시 높이고 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철인5종 경기가 철인10종 경기로 대체되는 셈이다. 이러면 장차 3차 대전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정시는 곧 수능 100%’는 2018년 성립된 사회적 합의의 전제다. 이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훼손할 것이 아니라, 소신과 철학을 드러내며 사회적 토론을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범



서울대 학부에서 생물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수능 과학탐구 강사가 돼 ‘메가스터디’ 창업에 참여했다. 2003년 ‘일타강사’ 시절에 은퇴한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 교육평론가,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겨레신문·시사인·허핑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 <문재인 이후의 교육> 등이 있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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