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장 강력한 사회보장…회생·파산
한동안 나라에 창업 붐이 일었다. 기업은 사무실 한쪽을 연구소로 꾸미고는 기금을 지원받았고, 대학생들 사이에는 창업 자금을 지원받아 CEO 명함 새기는 일이 졸업 작품마냥 여겨졌다.
사회가 변하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삶도 따라 변한다. 그러나 같은 풍랑도 배마다 겪는 바는 다르듯, 동일한 사회 변화도 개개인이 받는 충격은 퍽 다르다. 어디든 변화에 따른 충격을 유독 강하게 받는 곳이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 그 충격을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남겨 버리면 마치 몸에 멍이 쌓이는 것처럼 그 사회도 병이 든다.
신기한 법이 있다.
법 없이 살 사람도, 법 없으면 큰일 낼 사람도,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법이 하나 있다. 바로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법이다. 이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법칙이다.
그런데 세상에 참 신기한 법이 하나 있다. 바로 도산(회생·파산)법이다. 이 법은 빚진 사람이 빚 안 갚아도 된다고 한다. 심지어 돈 빌려준 사람이 돈 빌려간 사람더러 독촉하면 안 된다고도 하고, 그래도 계속 돈 갚으라고 하면 벌도 받는다고 한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악법도 이런 악법이 없다.
대체 왜 이런 신기한 법이 생겼을까.
자본주의는 경쟁이 필수 요소이다. 경쟁에는 이기는 쪽이 있는 만큼 지는 쪽이 반드시 존재한다. 한두 번 이겼다고 해서 계속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들 시험에 실패하거나 게임에 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험에 낙방하면 슬프다. 낙심하고 좌절한다. 게임에서 지면 답답하고 짜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시험에 실패하거나 게임에 진다고 해서 당장 인생이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다시 도전하거나, 다른 길을 택하면 된다.
그러나 사업과 인생은 다르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중병에 걸렸거나, 투자에 실패해서 가산을 탕진하면 다른 길이 없다. 삶의 사고가 닥쳤을 때 생활수준을 당장 낮추기 어렵다. 그래서 크고 작은 빚이 생긴다. 그런데 빚에는 이자가 복리로 붙는다. 연체는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을 수 없게 되면 처음 돈을 빌릴 때 잡고 있었던 희망이란 담보도 어느덧 자취를 감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 안전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Businesses fail.” (모든) 사업은 망한다. 하버드대 로스쿨 파산법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의 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천국이다. 그런데 도산제도는 역설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발전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때 맨해튼에서는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차도로 걸었다고 한다. 미국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만큼 그 부작용도 가장 심하게 앓았다. 낙오하는 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체제에서는 낙오자를 지키는 제도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것이 곧 사회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관념이 뼈저린 경험을 거쳐 정립되었다.
헌법은 우리의 경제체제에 관하여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이른바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하여 국민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회보장이며, 현재 소득,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 방면에서 사회보장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보장책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쉽게 알 수 있는 사회보장책으로 최저임금, 의무교육, 의료보험, 주택정책 등이 있다. 이들 모두 국가 예산의 뒷받침을 필요로 한다.
한편 사회보장책은 정책적이다. 정치적 여건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고, 따라서 수혜자 입장에서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도산은 법률로 보장된다. 법률 보장이라 할 수 있겠다. 법에 요건이 정해져 있으니 안정적이고 강력하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수혜자들은 똑같이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이 받을 혜택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으려면 아프지 않아도 사전에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러나 도산이라는 이름의 법률보험은 평소에 보험료를 낼 필요가 없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인지대라는 (사법) 서비스 요금을 내면 되는데, 개인회생은 3만원, 개인파산은 2000원에 불과하다. 법원은 이 돈을 받고 ‘성실하지만 불운했던 채무자’가 다시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심사한다.
경제적인 이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는 사례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래도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 회생·파산이라는 법률보험이 있기에 채무에 옥죄어 가정과 인생을 포기하는 일이, 살길이 없어 범죄에 내몰리는 일이 그나마 가끔씩 일어나고 만다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은 게임보다 인생에서 더 필요하다. 인생은 실전이니까.
박시형 법무법인 선경 대표변호사·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대한변호사협회 도산변호사회 부회장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처럼 결혼·출산 NO”…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주목받는 ‘4B 운동’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내 성별은 이제 여자” 女 탈의실도 맘대로 이용…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독] “초등생들도 이용하는 女탈의실, 성인男들 버젓이”… 난리난 용산초 수영장
- ‘女스태프 성폭행’ 강지환, 항소심 판결 뒤집혔다…“前소속사에 35억 지급하라”
- “송지은이 간병인이냐”…박위 동생 “형수가 ○○해줬다” 축사에 갑론을박
- “홍기야, 제발 가만 있어”…성매매 의혹 최민환 옹호에 팬들 ‘원성’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