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리개 씌워져"…34시간 통신 끊긴 '생지옥' 가자, 구조대도 못 불러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27일(현지시각) 오후 6시30분, 휴대폰을 확인하니 신호가 잡혀야 할 곳에 엑스(X) 표시가 떠 있었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고 메시지를 받을 수도,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두려움을 넘어 공포가 엄습했다. 우리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매 순간 죽음을 마주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눈에 눈가리개가 씌워졌고, 더 나빠졌다. (통신 두절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가자지구의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없으며 어떤 종류의 정서적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가장 두려운 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지상전을 본격 전개한 27일 저녁부터 29일 오전까지 가자지구 전역의 인터넷 및 모바일, 유선전화 등이 완전 두절됐다. 34시간 가량 지속된 통신 두절 기간 동안에도 이스라엘 공습과 지상 작전이 진행됐지만 가자지구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가족과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폭격 소리를 들으며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이 지역 주민 지아드(35)가 <가디언>에 29일 기고했다.
최근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소셜미디어(SNS)가 해당 지역의 공격 및 피해 상황 등 급박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알리는 수단 중 하나가 돼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통신 두절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답답함을 넘어 생존에 대한 위협이었다. 휴대전화와 유선전화 모두가 끊기자 공습으로 부상을 입어도 구조대에 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민방위 당국자 마흐무드 바슬을 인용해 통신 두절 기간 동안 구조대원들이 폭발이 발생한 방향을 관찰해 공습 장소를 특정해야 했다고 전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구조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1.6km 이상을 달려 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부상자 일부를 병원으로 우선 데려간 다음 구급대에 공습 위치를 알려 다른 부상자들을 구하도록 하기도 했다. 매체는 가자지구 보건부가 통신이 다시 연결된 뒤 구급대와 민방위 대원들이 수백 명의 사상자가 잔해 아래 갇혀 있거나 땅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가자지구 내무부 산하 의료 서비스 기관 책임자인 유수프 알로는 이번 통신 두절이 "전쟁 범죄"라고 비판했다.
통신 수단이 작동하지 않는 동안 주민들은 가족이나 친지가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조차 전해 듣지 못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통신 두절 기간인 27일 오후 6시부터 29일 정오 무렵까지 이스라엘 공격으로 약 679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가자시티에 거주하는 가자지구 기술 공무원인 샤반 아흐메드는 <로이터> 통신에 "사촌이 금요일(27일) 집에서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오늘, 일요일(29일) 아침에야 알았다"며 "이스라엘이 우리를 절멸시키기 위해 세계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가자지구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 7일부터 29일 정오까지 가자지구 누적 사망자는 8005명에 달한다.
구호기관, 언론 등 외부에 상황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가자지구 상황을 매일 취합하는 유엔(UN)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8일 보고서에서 "29일 저녁 6시부터 가자지구의 유·무선 전화 및 인터넷 서비스가 끊겨 이번 보고서는 지난 24시간 동안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인도주의적 상황에 관한 최소한의 내용만 담게 됐다"며 "통신 두절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도주의적 지원 전달이 완전히 중단됐고 생명을 구할 정보가 박탈되고 있다"고 밝혔다.
가자지구 주민들이 이스라엘 쪽이 고의로 통신을 끊었다고 의심하는 가운데 <뉴욕타임스>는 2명의 미국 당국자에 따르면 미국은 통신 두절의 책임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통신 회사인 팔텔그룹 최고경영자(CEO) 압둘마지드 멜헴은 회사가 아무런 수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29일 오전 4시 무렵부터 통신이 복구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통신이 부분적으로 재개된 방법이나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며 이스라엘 정부가 통신 두절과 복구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쪽은 관련해 논평을 거부했다. 2명의 미 당국자는 이스라엘 쪽에 통신 복구를 위해 가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고 매체에 전했다.
통신 두절 기간 동안 공포에 질린 주민들이 구호기관에 쌓인 물품을 탈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는 29일 보도자료를 내 전날 수천 명의 주민들이 가자지구 중부와 남부에 위치한 UNRWA 창고 및 분배 센터에 침입해 밀가루, 위생용품 등 생필품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UNRWA 가자지구 담당 국장 토마스 화이트는 "이는 3주 간의 전쟁과 가자지구 봉쇄로 시민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우려스러운 신호"라며 "전화와 인터넷 통신선이 끊기며 긴장과 공포가 더 심해졌다. 주민들은 가자지구에 있는 가족 및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혼자라고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이트 국장은 지난 21일부터 이집트와 이어진 라파 검문소를 통해 가자지구에 구호 트럭이 반입되고 있지만 그 양이 터무니 없이 적다는 점도 지적했다. 구호기관들이 최소 하루 100대의 구호 트럭이 이 지역에 반입돼야 한다고 보는 상황에서 27일까지 이 지역엔 하루 최대 20대의 트럭이 진입했을 뿐이다. 그나마 28일엔 통신 두절로 트럭이 들어오지도 못했다. 통신 재개 뒤 29일엔 지금까지 하루 반입 최대 규모인 33대의 트럭이 이 지역에 진입했다. 분쟁 전 이 지역엔 하루 500대 가량의 구호 트럭이 들어갔다. 화이트 국장은 "너무 적은 트럭, 느린 절차, 엄격한 검사, UNRWA 및 다른 구호 단체의 요구와 맞지 않는 물품, 연료 반입 금지" 등을 지적하며 "현재 운송 시스템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 쪽도 가자지구로의 구호 물자 지원을 방해하는 행위는 범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 언론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을 보면 ICC 검사인 카림 칸은 주말 라파 검문소를 방문한 뒤 29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도주의적 물품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이집트 라파에 갇혀 있는 것을 봤다"며 "제네바 협약에 규정된 구호품 공급을 방해하는 행위는 법원 관할권 내에서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스라엘에 민간인들이 기본적 식량과 의약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체 없이 분명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가자로 전달되는 구호물품은 먼저 이스라엘의 검사를 거친다. 팔레스타인은 ICC 회원국이지만 이스라엘은 ICC 회원국이 아니다. ICC 관할권은 가자지구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까지만 미치지만 칸 검사는 지난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공격해 이스라엘 쪽에서 1400명 이상이 죽고 230명 가량의 인질을 납치한 사건도 다룰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ICC는 2021년부터 가자지구 및 서안 관련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백악관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2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통화에서 "가자지구 민간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 흐름을 즉각적으로 크게 늘릴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통화에서 "민간인 보호를 우선시하는 국제인도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자국민들 보호할 권리가 있다고 네타냐후 총리에게 말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이날 익명을 요청한 미 정부 당국자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로 하루 트럭 100대 반입 허용을 약속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관련해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한편 전쟁 "두 번째 단계"를 선언하며 27일부터 가자지구에서 본격적인 지상 작전을 전개 중인 이스라엘군은 29일 언론 브리핑에서 가자지구 내부에서 지상군이 계속 전투 중임을 확인하고 밤새 더 많은 지상군을 투입했다고 밝혔다.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점진적으로 지상 작전과 우리 군의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며 "공중, 해상, 지상에서 우리 군의 안전을 보장하고 전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이스라엘군은 장갑차와 보병 활동을 담은 가자지구 내부에서 시행 중인 지상 작전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스라엘군 공개 자료 및 자체 분석을 통해 이스라엘군이 적어도 세 방면에서 가자지구로 진입했다고 봤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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