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번 긁어낸 한지···한계를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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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는 질기다.
한지는 동양화를 전공한 이들에게 숙제와도 같은 재료이지만 그는 이 한계를 한지를 파괴함으로써 극복한다.
그는 동양화 전공이지만 유명한 현대미술작가들이 그렇듯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해 멀쩡한 한지의 표면을 벗겨내고 한지 밑 공간을 바깥으로 끌어낸다.
그의 작품은 '한지에 수묵'이지만 잘 모르는 이들이 보면 유화라 생각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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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겹 쌓고 적셔 표면 벗겨내
유화같은 느낌의 수묵화 구현
분수·정원·창문 등 연작 선봬
한지는 질기다. 시간이 지나 말라 건조 됐을 때는 그 질김이 더욱 강력해진다. 그래서일까. 국내의 많은 작가들은 질김이라는 한지의 특성에 도전하는 행위를 작품 제작의 일부로 삼는 일이 많다. 한지를 물에 적시거나 막대기 등으로 밀어내 찢거나 구겨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최근 작고한 박서보 화백 역시 한지를 자로 밀어내 일정한 간격의 선을 만들어내는 ‘묘법’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유근택은 한지를 이용하는 국내의 많은 작가들 중 가장 파괴적이다. 한지는 동양화를 전공한 이들에게 숙제와도 같은 재료이지만 그는 이 한계를 한지를 파괴함으로써 극복한다. 작가는 두꺼운 한지를 여러겹 쌓아 붙인 후 이를 다시 물에 적신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한지를 철솔로 긁어낸다. 수백 번 긁어내다 보면 한지의 표면은 깔끔하지 않게 바른 시멘트 벽처럼 너덜너덜 해진다. 그는 동양화 전공이지만 유명한 현대미술작가들이 그렇듯 엄청난 노동력을 투입해 멀쩡한 한지의 표면을 벗겨내고 한지 밑 공간을 바깥으로 끌어낸다. 노동의 시간이 끝나면 비로소 예술이 시작된다. 그의 작품은 ‘한지에 수묵’이지만 잘 모르는 이들이 보면 유화라 생각하기 쉽다. 작가가 한지 표면을 긁어내 유화 물감을 덧입힌듯한 효과를 만들어낸 덕분이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유근택 개인전 ‘반영’은 노동에서 예술에 이르는 작가의 작품 제작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1층 전시장의 ‘창문’ 작품은 얼핏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연상되지만 그보다는 더욱 먹먹하다. 작가가 부친의 사후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그렸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뭉클함은 한 층 커진다.
1층의 작품은 실내를 주제로 하는데, ‘창문’ 시리즈는 방 안에서 방 밖을 그렸다는 점에서 발상의 전환이 새롭다. 다소 침울한 마음은 2층에서 정화된다. ‘봄’ ‘정원’ 등으로 명명된 100~200호 크기의 대형 작품에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새싹, 꽃이 가득하다. 특히 물가에 반사된 나무를 그린 ‘반영’ 연작은 멀리서 보면 실제로 연못이 있는 숲을 거닐고 있는 마음이 들게 하며 감상자를 치유한다.
지하 전시장에는 그의 대표작 ‘분수’ 15점이 걸려있다. 작가는 1990년 대 중반부터 분수를 그려왔는데, 분수를 지탱하는 분수대가 아닌 물 자체에 집중한다. 물의 파편이 분수가 위치한 장소를 가리고, 해체하는 모습을 표현해 생동감을 더한다.
작가는 1988년 홍익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1997년 동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갤러리현대를 비롯해 대구미술관, 사비나미술관, 성곡미술관, OCI미술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열린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에 맞춰 재즈 기반 뮤지션이자 베이시스트 정수민의 앨범 ‘유근택:반영’을 발매한다. 유근택의 개인전을 음악적 언어로 풀어낸 앨범으로 11월 8일 전곡이 음원 사이트에 공개된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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