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영의 이제 좀] HIV, 과학보다 질긴 편견
[미디어오늘 황두영 작가]
최근 종영한 ENA드라마 <유괴의 날>은 매력 있는 드라마지만, HIV/AIDS에 대한 부정확하고 낡은 묘사 때문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주인공 중 한 명은 어릴 적 일종의 의료사고 때문에 HIV에 감염된다. 1990년대에 어떤 비밀스러운 치료로 완치되었다가 성인이 된 현재 다시 발병했다는 설정도 비과학적이었지만, 가장 용납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자신의 피로 상대방을 전염시키면 복수가 완성될 것이라고 여기는 장면이다.
HIV/AIDS가 처음 알려진 1980년대와 달리, 의학기술이 발전해 현재는 감염되어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가 검출한계치 이하로 유지된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는 체액이 교환되더라도 상대에게 병을 전파시킬 수 없다. 이는 유엔에이즈계획(UNAIDS) 뿐 아니라 최근 한국 헌법재판소에서 인정할 정도로 의학적으로 명확한 내용이다. 극 중에서 해당 인물은 감염내과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신약 임상실험에 자원할 만큼 치료에 적극적이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피가 복수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다는 것은 오랜 편견에 기댄 게으른 설정이다.
물론 허구의 영역 안에서야 작은 막대기로 용을 부를 수도 있고, 반지 하나에 세계를 파괴할 힘이 있다고 설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소재를 끌어올 때는 활용방식이 직접적, 간접적으로 사회적 무지와 편견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는지 신중해야 한다. <유괴의 날>이 SF적 요소가 많은 작품인 만큼, 차라리 어떤 불명의 불치병이라고 설정했다면 차라리 맘 편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현실에서 많은 편견에 시달리는 질병을 가져와, 극의 진행에 필요한대로 자의적으로 왜곡해 사용한다. 병은 병일뿐이다. 신의 저주나귀신들림 같은 신비의 영역이 아니다. 수많은 인력이 참여하는 상업 드라마에서 아무도 이 정도의 과학적 검증을 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다. HIV/AIDS이 편견과 무지에 휩싸인 병이 아니었다면 드라마가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긴 드라마 하나 탓해서 뭐하나 싶기도 하다. 10월26일, 헌법재판소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제19조인 전파매개행위죄에 대해 합헌이라고 결정하며 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편견을 여지 없이 드러냈다. 이 조항은 감염인이 성행위 등 혈액 또는 체액을 상대방에 전달하는 행위를 하면, 실제 전염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하는 조항이다.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일부위헌이라는 입장을 내 다수였지만, 심판정족수 6인에 이르지 못해 합헌 결정 되었다.
이 조항은 HIV/AIDS에 대한 정보가 없고 공포가 만연했던 1987년 법 제정 때 유지되어 온 조항이다. 하지만 이제 다수의 HIV 감염인들이 복약을 통해 '미검출=감염불가' 상태가 되었는데도 조항이 유지되었다. 그러면서 전파의 위험이 없는 감염인에게까지 성행위 등의 행동자유권을 침해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이 조항을 악용해 감염인들이 협박이나 갈취를 당하는 일들이 어졌다. 북미 등 많은 국가에서는 미검출 감염인의 체액 전파 행위를 처벌하지 않도록 법을 바꿨고, 이후 적극적인 치료 참여가 늘어 신규 감염자 수가 줄어들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미검출=감염불가'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음을 인정한다. 다만 '상대방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감염인과의 성행위로 인하여 완치가 불가능한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며 오래된 편견을 동시에 수용한다. 모순되는 두 가지 명제를 한 결정문에 쓰면서 이렇다할 설명도 없다. 과학적으로 '감염인'과 '치료를 받은 감염인'은 완전히 다른 위험을 가진 상태가 되었음에도, 헌재는 낡은 편견에 기반해 게으른 결정을 했다. 적어도 미검출 여부를 반영하도록 개정하라는 요구라도 국회에 했어야 한다.
HIV/AIDS 감염인들이 소외된 자들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아무런 설명 없이 권리를 칼질할 수 있을까. 과학적 사실이 변해도, 이미 존재하는 편견이 또 다른 연쇄적 차별의 근거가 되는 악순환은 끊어내기 어렵다. 편견이 과학보다도 참 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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