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광장] 정치, 드라마만 있고 시스템이 없다
한국 정치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야 인물들도 평범하지 않다. 비정상적인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독특하다. 상식을 거스를 때가 흔하다는 말이다. 예측하기 어렵다. 상궤를 무시한다는 말이다. 행동이 급변한다. 변덕스럽다는 말이다. 작위적이다. 자연스러운 순리와 어긋나곤 한다는 말이다. 엽기적이기도 하다. 비윤리적, 심지어 초법·불법적 행동도 불사한다는 말이다. 정치인들이 이래야 사회의 관심을 끌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 유권자는 정치인들의 튀는 모습에 응원을 보내기도 하고 욕을 퍼붓기도 하며 정치에 관심을 기울인다. 드라마보다 더 이상하다고 느끼며 정치인들에게 신경을 사로잡힌다.
우리만의 상황은 아니다. 오늘날 미국 정치라는 드라마도 그렇다. 트럼프라는 한 인물이 무대를 뒤흔들고 있다. 비정상, 몰상식, 탈(脫)상궤, 변덕, 허위, 비윤리, 불법이 난무하는 드라마의 끝판왕이다. 미국 유권자는 환호하거나 증오하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트럼프 주연 인물극에 빠져 있다. 미국 정치지형은 트럼프 지지파와 반대파, 둘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독무대다.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직은 떼어놓은 당상이고, 백악관에 재입성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선두 주자인 미국이 이 지경이다. 권위주의적인 여타 국가들은 오죽하겠는가.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자만했던 우리도 극적(劇的) 인물들이 주도하는 정치를 지켜보고 있다.
이런 인물 중심 정치 드라마에 중요한 게 실종되어 있다.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제도와 규범이다. 작동 틀이다. 몇몇 인물에 좌우되지 않는 제도와 규범의 판이다. 시스템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서서히 형성된다. 그런 만큼 평범, 정상, 상식, 상궤, 상례, 순리와 부합한다. 이 시스템 속에서 정치와 국정이 이뤄져야 한다. 시스템은 인물들이 활약하는 드라마보다 동적(動的)이지 않은 것 같고, 새로워 보이지 않아 국민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래도 시스템은 정치와 국정의 기초와 근간을 세워 각종 돌발변수가 발생해도 중심이 무너지지 않고 방향을 잡게 해준다.
여론 지지를 높이고 선거 승리를 거두는 데 급급한 정치권은 여야 막론하고 흥미 위주 인물극에만 매달린다. 난기류가 발생하면 비상대책위원회나 혁신위원회를 만들고 "공천 혁명"을 외치며 인물들을 바꾸려 한다. 개각이나 당직 개편을 통해 새 인물들을 내세우기도 한다. 다 바꿔, 갈아엎어, 표어에 유권자는 욕하면서도 또 속는 셈 치고 흥미를 보이고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시스템이 엉망이거나 아예 없는데 인물들만 바꾼다고 나아질까? 제도와 규범의 작동 틀을 고려치 않고 인물들만으로 승부를 보려 하면 모래성을 쌓는 것이다. 바람 한번 불면 무너진다. 새 인물들의 좌충우돌 임기응변이 난관에 부딪혀 좌초하고 갈등·교착을 일으키는 건 시간문제다. 유권자도 곧 또 염증을 느낀다. 바꿔도 소용없다며 환멸감, 불신감만 커진다.
일본처럼 시스템만 강하고 인물들의 활기가 약해도 곤란하다. 현상만 유지되고 변화는 힘들어진다. 우리처럼 시스템은 없고 인물들만 있어도 문제다. 끊임없는 움직임에도 이뤄지는 것이 없다. 마땅한 변화도 안 생긴다. 어수선한 혼돈만 계속된다. 정치의 관건은 드라마와 시스템의 균형과 조화다. 양자가 균형 있게 존재하며 조화롭게 맞물려야 한다. 시스템 없는 인물 드라마는 저질 막장이 되기 쉽다. 시스템 속에서 품격 있는 정치 드라마가 펼쳐져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시스템을 생각할 때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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