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숫자’ 제시 없는 ‘개혁’…흩어지는 동력
윤석열 정부가 연금·의료 분야 등에서 핵심 숫자를 비운 ‘공백’ 개혁안을 거듭 내놓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개혁 의지를 표명해온 데 비춰보면 내용은 부실하고 속도는 늦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민한 쟁점을 피해 공을 넘기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개혁 시발점에서부터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3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두고 ‘숫자 없는 맹탕’, ‘선거 앞둔 몸 사리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과학적 근거나 사회적 합의 없이 결론적인 숫자만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27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개혁안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수치 등이 빠져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이런 비판에 직접 반박하면서 거듭 개혁 의지를 표명하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의결된 정부안은 국회로 넘어가 공론화와 구체화 작업을 거친다. 정부안이 제시되지 않은 이상, 향후 개혁 주도권을 정부가 쥐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개혁 의지만 강조했을 뿐 구체적 개혁안 마련은 국회로 떠넘긴 셈이다.
지난 1년 6개월간 정부가 추진한 개혁 과제마다 핵심 숫자가 빠지거나, 숫자를 제시했다가 혼선을 빚고 철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최근 발표된 필수의료 개혁안은 핵심인 의대 정원 확대 규모가 빠진 형태로 발표됐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여권이 강하게 힘을 실었지만 ‘개혁 구체화’까지는 갈 길이 먼 상태다.
연금과 함께 윤 대통령이 3대 개혁과제로 제시한 노동·교육 분야는 안을 내놓았다가 철회하는 혼선을 빚으며 이미 동력이 꺾였다. 지난해 박순애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총리가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5세로 낮추는 학제 개편안을 밝혔다가 결국 사퇴했다.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개혁안은 ‘주 최대 69시간 노동’ 논란 속에 윤 대통령까지 나서 바로잡는 혼선을 빚었다. 이후 현재까지 근로시간 개편안의 핵심이 제시되지 않은 채 개혁안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 같은 혼선들이 정부가 구체적 개혁안 제시를 ‘공론화’ 이후로 미뤄놓는 데 일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의 ‘3대 개혁 원년’ 다짐은 무색해지고 있다. 개혁 과제들이 추진 초반에 차례로 논란을 겪으면서 추진 동력은 흩어지는 중이다. 정부안이 핵심을 피해간 형태로 제시되면서 국민 여론을 집결해 개혁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추진력은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각종 개혁 과제를 추진하기에 ‘정치적 셈법’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많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정권 초기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도 될까 말까인데 이대로면 개혁이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면서 “3대 개혁 등 타이밍을 다 놓쳤다. 이제는 ‘총선용 알리바이’ ‘면피용’ 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연금 개혁에서) 구체적 숫자 없이 방향성만 나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면서 “다만 연금개혁은 현재 정치적으로 숫자를 제시하기에 부담스럽고 이를 구체화하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6일째인 지난해 5월 16일 국회의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에서 ‘3대 개혁’을 제시한 후 줄곧 이를 강조해왔다. 지난 연말엔 “노동·교육·연금 개혁은 인기가 없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며 “2023년을 개혁 추진의 원년”으로 선언했다.
유정인 기자 jeongin@kyunghyang.com, 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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