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섭의 MLB스코프] 반격에 성공한 애리조나, 3차전도 가져올까
[스포티비뉴스=이창섭 칼럼니스트] 단기전에서 1차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1차전 결과로 누군가는 분위기를 이어가고, 누군가는 분위기가 꺾이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단기전에서는 결코 과언이 아니다.
지난 결과들도 이 사실을 증명한다. 지난 20번의 월드시리즈에서 1차전 패배를 극복하고 우승한 팀은 겨우 4팀이다. 1차전 승리 팀의 우승 확률이 80%였다.
지난 20년간 1차전 패배 후 우승팀
2009 - 뉴욕 양키스
2016 - 시카고 컵스
2017 - 휴스턴 애스트로스
2022 - 휴스턴 애스트로스
불리한 출발을 이겨낸 네 팀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정규시즌 100승 팀이었다. 2009년 양키스와 2016년 컵스는 103승, 2017년 휴스턴 101승, 여기에 지난해 휴스턴은 106승이었다. 정규시즌 100승 이상 올렸다는 건 전력 자체가 대단히 탄탄했다는 뜻이다. 1차전을 내줘도 남은 시리즈 동안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팀들이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사정이 달랐다. 애리조나는 정규시즌 84승 팀이다. 단축 시즌을 제외하면 2006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만이 애리조나보다 더 적은 83승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2006년 세인트루이스는 1차전을 승리한 후 우승을 차지했다(4승1패).
애리조나는 상대적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보다 전력이 떨어졌다. 이에 1차전을 승리해야 텍사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시리즈로 여겨졌다. 하지만 1차전을 패배했다. 심지어 9회 말 동점 투런포와 11회 말 끝내기 홈런을 내주면서 고개를 숙였다. 시리즈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패배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다.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팀은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지나간 일은 얼른 잊고, 다가올 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흔히 "마무리 투수는 기억 상실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실패에 더 익숙해져야 할 야구에서는 모든 선수들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흐름'을 무시할 수 없는 단기전에서 이 말을 실천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애리조나의 2차전은 놀라웠다. 경기 전 알렉 토마스는 텍사스 글로브라이프필드에 대해 "텍사스 팬들은 필라델피아 팬들만큼 시끄럽진 않다"고 말했다. 더 힘든 환경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애리조나는 모든 압박감에 위축되지 않았다. 타선이 폭발하면서 9-1 완승을 거뒀다. 2001년 원정에서 모두 패했던 애리조나의 월드시리즈 첫 원정 승리였다. 선발 전원이 안타를 친 애리조나는, 2007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1차전 17안타 이후 월드시리즈 최다 안타 경기를 만들었다. 참고로, 월드시리즈 한 경기 최다 안타 기록은 2001년 애리조나가 보유하고 있다. 그 해 6차전에서 22안타를 합작한 바 있다.
선발 메릴 켈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텍사스의 화력을 완벽히 잠재웠다. 7이닝 1실점, 탈삼진은 9개였고, 사사구는 없었다. 켈리는 2020년대 들어 월드시리즈에서 7이닝 이상 던진 첫 번째 투수가 됐다(2019년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 게릿 콜).
켈리의 이번 포스트시즌 피칭 내용
DS 1차전 : 6.1이닝 0실점
CS 2차전 : 5.2이닝 4실점
CS 6차전 : 5.0이닝 1실점
WS 2차전 : 7.0이닝 1실점
*4경기 3승1패 ERA 2.25 (24이닝 6실점)
켈리는 메이저리그 첫 포스트시즌 출장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이고 있다. 디비전시리즈 1차전을 통해 지긋지긋한 다저스 악몽을 탈출하더니, 팀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큰 힘을 보태고 있다. 1선발 잭 갤런이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2승2패 ERA 5.27) 2선발 켈리의 피칭이 더 빛나는 상황. 애리조나는 선발진에서 원투펀치 비중이 높은데, 만약 켈리마저 고전했다면 지금의 위치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경기 패배가 시리즈 탈락으로 직결되는 경기를 일리미네이션(elimination) 경기라고 한다. 이 경기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must-win'으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애리조나 입장에서 2차전 같은 경기는'near must-win'이었다. 패한다고 해서 시리즈를 내주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승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경기였다.
애리조나는 기사회생했다. 곧바로 균형을 맞추면서 시리즈는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3차전을 가져가는 팀이 유리한 고지를 밟게 됐다. 7전 4선승제 시리즈에서 1승1패 시 3차전을 승리한 팀은 99번 중 68번을 우승까지 성공했다.
3차전은 장소가 바뀐다. 애리조나의 홈구장 체이스필드다. 애리조나는 이번 포스트시즌 홈에서 3승1패로 좋았다. 하지만 '홈 애리조나'보다 무서운 팀이 '원정 텍사스'였다. 텍사스는 이번 포스트시즌 원정 8경기에서 한 경기도 패하지 않았다. 1996년 양키스와 더불어 단일 포스트시즌 원정 8승무패를 기록한 역대 두 번째 팀이다.
포스트시즌에서 강조되는 부분 중 하나는 홈 어드밴티지다. 일반적으로 홈에서 경기를 치렀을 때 결과가 더 좋았다. 그런데 올해는 이 상식이 빗나가고 있다. 언더독 팀이 시리즈를 가져오는 '업셋'이 늘어나면서 홈 어드밴티지가 무용지물이 됐다. 이번 포스트시즌 각 팀들이 홈에서 기록한 합산 성적은 15승23패로, 승률이 0.395밖에 되지 않는다. 반대로 23승15패를 기록한 원정 팀들의 승률은 무려 0.605에 달한다.
단일 포스트시즌 원정 최고 승률
2023 - 0.605 (23승15패)
2010 - 0.594 (19승13패)
1996 - 0.563 (18승14패)
2019 - 0.541 (20승17패)
*1995년 디비전시리즈 이후
텍사스의 원정 강세를 막아야 하는 애리조나 선발 투수는 브랜든 팟이다. 올해 5월4일에 올라온 팟은 데뷔전 상대가 다름 아닌 텍사스였다. 첫 맞대결은 완패였다. 4⅔이닝 동안 홈런 4개를 허용하면서 7실점으로 무너졌다. 팟은 이 날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경기다.
팟은 데뷔 초반 피홈런 문제가 심각했다. 첫 8경기 37⅓이닝 13피홈런이었다. 9이닝 당 3.13개 수준이다. 그러나 브렌트 스트롬 투수코치의 도움으로 약점을 보완했다. 투수판 밟는 위치를 1루 쪽으로 가까이 옮기면서 주무기 스위퍼의 궤적을 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장타를 억제할 수 있는 싱커를 장착, 와인드업 동작에서 손과 글러브가 떨어지는 습관도 교정했다. 텍사스가 5월에 손쉽게 무너뜨렸던 신인 투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팟은 포스트시즌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승리는 없지만, 평균자책점이 2.70이다(16⅔이닝 5실점). 맡은 이닝을 최소한의 실점으로 막아내면서 팀이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내일도 애리조나는 팟이 버티는 동안 점수를 뽑는 승리 공식을 이어가야 한다.
텍사스는 맥스 슈어저가 가장 높은 무대에서 친정팀을 맞이한다. 우리가 알던 기존의 슈어저라면 3차전 선발 매치업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다. 그러나 올해 슈어저는 기복이 심해졌고, 이제서야 막 어깨 부상에서 돌아왔다. 챔피언십시리즈 두 경기 역시 4이닝 5실점, 2⅔이닝 2실점으로 아쉬운 모습이었다.
우완 슈어저가 나오면 좌타자 코빈 캐롤이 1번, 스위치 히터 케텔 마르테가 2번으로 나설 예정이다. 애리조나는 캐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과제였는데, 포스트시즌 18경기 연속 안타를 치고 나간 마르테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애리조나의 스몰볼은 출루가 이뤄져야 활성화된다. 토미 팸이 2차전 4타수 4안타로 타격감을 끌어올린 것은 고무적이다. 또한 주포 크리스티안 워커가 2차전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로 그동안의 침묵을 깨뜨릴지가 관심사다. 워커가 살아나야 애리조나는 스몰볼에 빅볼도 추가할 수 있다.
우승까지 가야할 길은 여전히 멀다. 하지만 애리조나는 귀중한 원정 1승을 챙기면서 홈에서 시리즈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체이스필드 외야 수영장은 다시 한 번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을까. 한편, 체이스필드에서 열리는 3,4,5차전 티켓은 이미 매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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