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조 예산전쟁' 돌입...지뢰밭 속 여야 양보없는 벼랑끝 대결
오는 31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을 시작으로 657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예산 전쟁'이 막을 올린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사실상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에 반해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내년도예산안이 재정 건전화와 약자 복지를 담고 있는 만큼 정부 원안대로 통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올해도 예산안 처리를 두고 지난한 힘겨루기가 예상된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은 30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우리가 제안한 예산안들 심사과정에서 지난해와 같이 대통령실에서 감 놓아라 콩 놓아라 하는, 그런 식으로 예산 심사할 생각이라면 아예 협의 자체를 안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홍 원내대표는 "만약 예산안이 제 때 법정시한을 못 지키고 원만히 합의되지 못하면 전적으로 여당과 대통령실에 책임이 있다"고도 했다.
이러한 민주당의 강경한 기류와 관련해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내년도 예산과 관련해 야당 공세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각 상임위 심사단계에서부터 철저히 대응해주시고 예결위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들께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특히 " 정치공세, 가짜뉴스에 대해선 팩트로 대응해줘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야당의 거센 공세에 밀리지 않겠다는 전의를 다진 것이다.
민주당이 예산 문제에 쉽게 합의해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올해 예산안 처리가 지난해처럼 늦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실제로 1988년부터 2014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전까지 법정 시한을 준수해 예산안이 처리된 경우는 단 6차례에 그쳤다. 국회선진화법(국회법 개정안)이 시행된 2014년 이후에도 법정 시한 내에 예산안이 처리된 것은 2014년과 2020년 2차례에 불과하다.
헌법은 예산안 처리에 대해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의결해야 한다'고 강행 규정으로 명시하고 있다. 회계연도 시작일인 1월 1일부터 역산하면 12월 2일이 데드라인이다. 국회법 85조는 '국회는 예산안, 기금운용계획안 등에 대한 심사를 11월30일까지 마쳐야 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다음날인 12월 1일에 상임위에서 심사를 마치고 본회의에 자동 부의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돼 있다.
지난해의 경우 사상 초유의 준예산 우려가 나올 정도로 여야가 연말까지 강 대 강 대치정국을 이어갔다. 지난해 예산안의 경우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를 두고 여야가 대치하면서 법정 처리 시한은 물론 정기국회 종료일에도 처리를 하지 못했다. 계속 처리가 늦어지자 결국 김진표 국회의장이 △정기국회 종료일인 9일 △이후 최종 시한으로 정한 15일 △다시 최종시한으로 정한 19일 등 총 4차례나 '데드라인'을 미룬 끝에 24일 새벽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는 분석도 있다. 당장 정부 예산안에 대한 이견 뿐만이 아니라 야당이 일방 처리를 주장하고 있는 노란봉투법, 방송3법이 뇌관이다.
이날 윤재옥 원내대표는"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 기업구조조정 촉진법 등 시급한 법들이 있는데 국정감사 때문에 3주 정도 법안 처리에 어려운 점이 있었다"며 "빨리 여야가 만나서 11월 9일 본회의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홍 원내대표는 "법안 심사 과정에서 비쟁점 법안을 통과하는데 연연하지 말고, 한 개라도 우리 삶의 변화를 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더해 "마지막에 가면 법안들이 상임위별로 법안 통과율 때문에 하나마나 한 법안들을 통과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했다. 사실상 여당의 법안처리 요구를 들어주기보다는 야당이 주도하고 있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의 본회의 처리에 당력을 집중해 달라는 것이다.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등은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예고하며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법안들은 다음달 9일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등 4개 법안에 대해 각각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경우, '필리버스터 시작 24시간 후 강제 종결'이 네 차례 반복되면서 최소 5일이 필요한 상황이다. 빨라야 다음달 13일에나 모든 절차가 종료된다는 얘기다.
야당이 수적 우위를 앞세워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대통령실은 국가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등 국익을 침해하는 법안, 이해당사자들 간에 갈등이 첨예한 법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합의 없이 강행 처리된 법안 등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방침이라고 밝혀왔다. 결국 예산안 심사가 이뤄지는 11월 내내 노란봉투법 등 쟁점법안을 두고 여야가 극렬하게 대치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예산안 심사를 제때 마무리하지 못하면 다음달 2일엔 당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이 본회의에 자동상정된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예산안의 본회의 처리 가능성은 낮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야당이 일방적으로 수정예산안 처리를 시도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연내 예산안 처리가 불발돼 준예산이 편성될 수도 있다. 준예산이란 다음 해 회계연도 개시일까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전년도에 준해 짜는 임시 예산을 뜻한다. 신규 사업 예산지출이 막히면서 경기대응 등 국정운영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만약 준예산까지 발동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국정운영의 책임을 지고 있는 여당의 부담이 커질수 밖에 없다. 당장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예산안 처리 지연은 집권여당에게 부담이다. 이 때문에 야당이 요구하고 있는 R&D(연구·개발) 예산, 새만금 개발 관련 예산의 원상회복 문제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도 있다. 일각에선 총선을 앞두고 여야 의원들이 각각 자신의 지역구 예산을 챙기면 굳이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예산안 처리를 늦추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현재 여야는 예산안의 법정기한 준수를 다짐하고 있다. 윤 원내대표 역시 법정기한 내 예산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란다"며 여당 의원들을 독려했다. 홍 원내대표도 "법적 기일을 지키려고 노력하겠다"면서도 "야당과 국민적 요구가 있는 민생 개정안은 정부가 반드시 가져올 것, 국회 심사권을 존중할 것, 이 두 가지 원칙이 전제된 하에서 법정 기한을 우리도 존중하겠다"고 했다.
민동훈 기자 mdh5246@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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