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안세영·우상혁 '강철 멘털'의 비결 …"이미 이긴 게임 속으로" [터치유]
"기량 아무리 좋아도 멘털 안 좋으면 롱런 어려워"
스포츠심리학에서 불안은 '꼭 필요한 에너지'
현명한 판단을 '어떻게, 빨리' 내릴지 돕는 일
편집자주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현대인의 숙제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이후엔 우울증세를 보인 한국인이 36.8%에 달하는 등 '코로나 블루'까지 더해졌죠. 마찬가지로 우울에피소드를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 기자가 살핀 마음 돌봄 이야기를 전합니다. 연재 구독, 혹은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취재, 체험, 르포, 인터뷰를 빠짐없이 보실 수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2009년 피겨 선수 김연아는 스트레칭을 하던 중 "무슨 생각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냐"는 PD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이같이 답했다. 한국의 피겨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의 당시 나이는 고작 스무 살에 불과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이 영상은 좀처럼 털리지 않는 스포츠 멘털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한국 차세대 스포츠의 저력을 확인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선수들의 정신력과 투혼은 빛났다.
배드민턴 여자단식 결승전에서 안세영은 1세트에서 오른쪽 무릎에 부상을 당했지만 칠전팔기의 모습을 보이며 3세트에서 순식간에 기세를 몰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 방수현 이후 29년 만의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이다.
2021년 도쿄올림픽 때 한국 육상 사상 최고 성적인 4위로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괜찮아"라고 소리치며 유명해진 우상혁은 이번엔 아쉽게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라이벌과 함께 셀카를 찍고 포옹을 하는 등 스포츠 정신은 잊지 않았다. "이제 내가 다크호스다. 파리올림픽에서 나를 더 무섭게 만들겠다"는 다짐도 더했다.
김연아, 안세영 그리고 우상혁. 1분 1초, 혹은 1점 차이로 생과 사를 오가는 스포츠 경기는 관중에게 환희와 감동을 선사하지만 늘 이겨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선수들은 어떻게 더 단단히 멘털을 부여잡는 것일까. 멘털을 지배해 경기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비결은 뭘까. 선수들의 멘털 관리 방법을 알면, 보통 사람들도 마음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이상우 프로축구 선수 출신 스포츠심리학 박사를 20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이 박사는 2008년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에 입단, 2016년 FC안양에서 은퇴했다. 현역 은퇴 후 인하대 스포츠심리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스포츠 심리교육 전문 기관인 '멘탈 퍼포먼스'를 설립, 현재는 팀과 개인에 심리 기술 훈련과 상담 등을 제공하는 멘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자기만의 승리 공식 준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만 집중"
이 박사는 "스포츠에선 멘털도 결국 '전략'이고 그 전략이 경기력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멘털이 강한 선수들은 '이렇게 준비하면 시합에서 유리하다'는 자신만의 승리 공식이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생각 않고) 그냥 한다'는 발언도 멘털 플랜이 명확해서 나온 걸 거예요. '경기에서 어떻게 싸우겠다'는 본인의 분석과 준비가 끝났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죠. 이미 이긴 게임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미 이긴 게임'에 들어가려면 여러 변수를 잘 파악하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요소에만 집중하는 능력도 필요하다고 이 박사는 전했다. 그는 "현재에 집중하는 멘털의 가지치기도 훈련해야 한다"며 "현재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에너지를 쏟아야 경기 중에도 멘털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좋은 예다. 김 선수는 무대 위에서 엉덩방아를 찧더라도 그 실수가 남은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박사는 "김 선수의 회복탄력성이 좋은 건 집중의 방향을 잘 정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과거는 우선 제쳐두고 현재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의 김연아는 본인의 강철 멘털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먼저 연기했던 라이벌 아사다 마오가 높은 점수를 받자 코치는 김연아 옆에서 과하게 환호했다. 하지만 김연아는 당시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세계신기록을 경신했다. 반대로 프리 프로그램에서 김연아 다음 순서로 나가게 됐던 아사다는 연기를 시작하자마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박사는 "우수한 선수들은 라이벌의 경기력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안다"며 "그 선수를 이기려면 오히려 내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판정 논란 끝에 은메달을 걸었지만 김연아는 "결과가 어찌 됐든 경기가 잘 끝났다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하기도 했다. 경기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기 때문에 결과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 셈이다.
"결과·상대·운과 상관없이 내 노력에서 원인 찾아야"
스포츠 선수들은 유독 징크스와도 연관이 있다. 이 박사는 "징크스도 결국 루틴과 관련된 것으로, 루틴을 잘 설정해서 최고의 상태를 만드는 습관적 행동 절차를 잘 만들면 자기 확신이 생긴다"며 "루틴이 명확하지 않으면 징크스가 돼버려 부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선수가 매번 '강철 멘털'을 지닌 건 아니다. 인간이기에 경기 전 불안이 몰려오는 것도 당연하다. 스포츠심리학에서도 불안을 '꼭 필요한 에너지'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 전에 여러 전략을 짤 수 있다는 것.
이 박사는 "불안은 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선수들에게도 불안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며 "오히려 이 불안을 갖고 경기 상황 때마다 마주할 수 있는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할지 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전략적인 집중은 중요하다. 이 박사는 "경기에서 이겼어도 결과 직후 바로 멘털 관리에 들어간다"며 "시합에 대한 보상을 찾고 과정 미흡형 귀인을 통해 멘털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한다"고 전했다. "가령 노력은 통제할 수 있지만 결과는 통제할 수 없죠. 승패와 관련 없이, 상대의 경기력과 관련 없이, 운과 관련 없이, 내 노력과 준비에 대한 원인을 찾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이 박사는 "아무리 기량이 좋은 선수도 멘털이 훈련되지 않으면 롱런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는 "심리 훈련도 결국 의지와 동기 수준이 있어야 향상될 수 있다"며 "보통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이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그렇게 간절한 이들이 교육 내용을 빠르게 흡수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내담자를 만났을 때 멘털 훈련을 흡수할 준비나 의지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난관 앞에서 현명한 판단을 어떻게, 빨리 내릴지 돕는 것"
해외에서는 스포츠심리학이 이미 보편화돼 있다. 미국의 경우 심리 코칭스태프가 절반 이상이라고. 국내는 여전히 '정신력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폐쇄적인 분위기가 존재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스포츠라는 특수성을 이해하는, 현역 출신 스포츠 심리 전문가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이 접하는 상담심리와 선수들이 필요로 하는 스포츠심리는 어떤 점이 가장 다를까. 그는 상담심리는 치료의 목적이 강하다고 했다. 평균 이하의 멘털을 평균 정도로 끌어올리는 데 목적이 있다. 반면 스포츠심리는 평균의 멘털을 이상적인 곳까지 향상시키는 데 집중한다. 치료가 아닌 경기력 또는 자신감 향상, 컨디션과 부정적 생각 관리 측면이 더 강하다.
이 박사는 스포츠심리학도 일반 심리학과 본질적으로는 비슷하다고 했다.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 현명한 판단을 '어떻게', '빨리' 내릴지 돕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멘털 디렉터로 많은 선수를 돌보고 있지만, 이 박사도 현역 시절 멘털은 썩 좋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탓에 늘 시합 때면 훈련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속을 끓인 적이 많았다. 하지만 스포츠 멘털 상담을 받으면서 경기 준비 과정과 실제 경기에서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 그리고 회복도 빨라졌다는 게 그의 경험담이다. 이 멘털 상담이 30대까지 선수 생활을 롱런한 비결이라고 이 박사는 설명했다.
치유하는 터전, 터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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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유'가 한국일보의 디지털 프로덕트 실험 조직인 'H랩(Lab)'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탐사선 H랩은 기존 뉴스 미디어의 한계선 너머의 새로운 기술과 독자, 무엇보다 새로운 성장 가능성과 만나려 합니다. H랩 시즌1 프로젝트인 '터치유'는 평범한 이웃의 비범한 고민 속, 마음 돌봄 이야기를 오디오 인터랙티브로 집중도 높게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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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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