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 이름이 새겨진 버스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어릴 때는 내가 생활하는 보육원에 큰 버스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많은 친구들과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설렘으로 가득 찼다. 소풍 가는 날 버스 안은 온통 떠들썩한 우리만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자랑이었던 큰 버스는 어쩐지 창피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단 하나, 버스 옆면에 크게 적힌 보육원 이름 때문이었다.
그 버스를 타고 놀러 갔던 어느 날, 목적지에 도착해 신나게 버스에서 내리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육원에서 다 같이 왔나 봐….” 그 말을 듣자마자 쥐구멍이라도 찾듯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것이 밝혀진다는 것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 뒤로 나는 보육원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할 때면 버스 창문에 달려 있는 커튼을 꼭 치고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커튼을 뚫고 내게 닿기라도 할 듯 조마조마했다.
보육원 퇴소 뒤 만났던 자립준비청년들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보육원 버스에는 보육원 이름은 안 적혀 있었는데, 차를 후원해준 기업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어”라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학교 친구들은 그게 보육원 차라는 것을 알지 않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응. 완전 알아.”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지만, 아직도 누군가는 그런 차를 타고 있다는 생각에 이내 씁쓸해졌다. 그 외에도 통학할 때 보육원 차를 타는 대신에 학교까지 걸어 다니거나, 매번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달라고 했다는 등 보육원 버스에 얽힌 친구들의 에피소드는 저마다 조금 난처한 방식으로 각양각색이었다.
보육원에 들어오는 후원 물품에 대한 기억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은 친구도 있었다. 후원 물품이 들어오면 물품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진이 자신도 모르게 지역신문에 나거나 후원 기업이나 기관의 홈페이지에 올라온다는 얘기였다. 감사한 마음과 별개로 얼굴이 노출되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의사는 종종 후순위로 밀렸다. 어디엔가 올라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 보육원에 사는 것을 알게 될까 마음 졸였던 경험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다.
자립준비청년이 이런 비슷한 경험을 겪고 비슷한 감정을 느낀 배경에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를 향한 외부의 편견 어린 시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육원 차에서 내리던 우리를 바라보던 시선, 후원 물품을 든 우리에게 꽂히던 날카로운 카메라 셔터 소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아무리 어려도 우린 다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들의 마음속 커튼을 더 닫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번쯤은 당사자 관점에서 세상을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가, 선의라고 생각하고 베푼 호의가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닿을지 처지를 바꿔 생각해본다면, 당사자들이 저마다의 커튼 뒤로 숨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여전히 어떤 아동에게는 시설 버스를 타는 일이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고, 누군가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자신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이란 존재를 세상에 내보여야 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세심한 공감에서 건강한 자립을 향한 첫 단추가 끼워질 수 있으니까.
내가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활동을 하는 것처럼, 다행히도 최근 들어 보호아동과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립준비청년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이것이 나를 구성하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리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또한 나를 포함한 당사자들의 용기에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이들이 늘어난 것도 체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의 따뜻한 손길과 마음을 느끼며 우리를 ‘보통의 청춘’으로 봐줄 날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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