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vs '노르마'…파격 연출 좋지만 결말은 '글쎄'

장병호 2023. 10. 3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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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예술의전당, 오페라로 격돌
'투란도트' 오리엔탈리즘 대신 무국적 무대
'노르마' 3500개 십자가로 압도적 볼거리
원작과 다른 결말, 연출 의도 못 살려 아쉬워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고전에 대한 파격적인 재해석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러나 지나친 변화는 원작의 고유한 정서를 깨뜨리기도 한다. 지난 주말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이 나란히 선보인 오페라 ‘투란도트’(26~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노르마’(26~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가 그러했다.

‘투란도트’, 손진책 연출 첫 오페라 도전

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투란도트’는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인기 오페라다. 가상의 중국을 배경으로 얼음 같이 차가운 투란도트 공주와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칼라프 왕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칼라프 왕자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 네순 도르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폴 포츠 등이 불러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종문화회관 서울시오페라단이 선보인 ‘투란도트’는 연극계 거장 손진책(76) 연출의 이름을 앞세웠다. 손 연출이 오페라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눈에 띈 변화는 원작의 오리엔탈리즘을 지운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잿빛 무대와 의상으로 ‘투란도트’를 무국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무용을 적극 활용해 3000석 규모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볼거리로 채운 점도 인상적이었다. ‘투란도트’로 한국 오페라 데뷔 무대에 나선 ‘월드 클래스’ 테너 이용훈의 빼어난 가창력 또한 박수 갈채가 이어졌다.

서울시오페라단 ‘투란도트’의 한 장면. (사진=세종문화회관)
가장 큰 변화는 결말이었다. 원작에서 칼라프를 짝사랑하던 시녀 류는 칼라프가 위기에 처하자 그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얼음 같이 차갑던 투란도트는 그런 류를 보며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칼라프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손 연출이 선보인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는 끝내 칼라프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손 연출은 “널리 공연되는 ‘투란도트’의 결말과 다르게 류가 지키고자 한 숭고한 가치를 더 깊이 되새기는 연출을 선보이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무대에선 이러한 연출 변화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엔딩만 바꾼 탓이다. 시종일관 답답했던 잿빛 무대 뒤편으로 환한 조명을 받으며 투란도트와 류가 민중과 함께 걸어나오는 모습 또한 다소 의아한 설정이었다.

‘노르마’,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 국내 초연

예술의전당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사진=예술의전당)
‘노르마’는 벨칸토 오페라(화려한 기교의 창법을 중시하는 오페라)의 대가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의 대표작이다. 로마 제국 시대, 옛 프랑스 영토인 갈리아를 무대로 드루이드교의 제사장인 노르마와 점령군 수장이자 로마의 총독인 폴리오네, 그리고 노르마를 따르는 여사제 아달지사의 비운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국내에서는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이번 공연에 특히 관심이 쏠렸다. 예술의전당은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의 2016년 시즌 개막작 프로덕션을 국내에 처음 선보였다. 국내에선 공연 영상 실황으로 먼저 소개된 프로덕션이다. 거장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의 선택을 받아 유명한 소프라노 여지원이 소프라노 데시레 랑카토레와 함께 노르마 역에 더블 캐스팅됐다.

오페라는 귀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눈도 즐거울 수 있음을 제대로 보여준 무대였다. 막이 오르자마자 무대 위를 가득 채운 3500여 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했다.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이 무대는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연출가 알렉스 오예(63)의 손길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오예 연출은 “종교가 도를 지나쳐 선을 넘어서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예수가 쓴 가시 왕관을 연상케 하는 무대 위 원형의 십자가가 이러한 연출 의도를 잘 보여줬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노르마’의 한 장면. (사진=예술의전당)
다만 ‘노르마’도 현대적인 각색에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특히 2막 1장에서 등장하는 노르마의 집을 TV와 소파 등 현대적인 무대로 꾸민 것이 그러했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 등장하는 현대적인 의상과 소품은 어색한 동거처럼 보였다. 결말 또한 원작이 지닌 급진적인 태도를 약화시켰다. 원작에서 노르마는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는데, 이는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모순에 대한 반항이자 혁명처럼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나 오예 연출은 노르마가 화형대에 오르기 전 아버지 오르베소의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결말을 바꿨다. 갑작스런 부성애의 등장으로 노르마의 숭고한 결정의 다소 퇴색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장병호 (solanin@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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