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 요동에 연구재료 수급 '비상'...R&D예산 삭감 '이중고'
강원도 정선군 예미산 지하 1000m에는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 중성미자를 연구하는 지하실험시설 '예미랩'이 있다. 308억원이 투자된 이곳 연구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해 한때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러시아는 중성미자 특성 연구에 사용되는 '섬광 단결정 검출기' 생산 기술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다. 전쟁으로 검출기 수급이 중단되면서 국내 연구도 직격탄을 맞았던 것이다.
29일 과학계에 따르면 국내 과학 연구에 사용되는 물질, 시료 등 재료는 대부분 수입산에 의존한다. 국제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실험실도 안절부절하는 이유다. 재료비 가격이 올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수입하기 일쑤다. 특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가 2024년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면서 실험실에서의 연구재료비는 '우선 감축' 대상이 됐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소속 한 박사후연구원은 "R&D 예산 삭감안 발표 후 '재료를 아껴가며 실험하자'는 지침이 내려왔다"며 "시도해보려 했던 다양한 실험 중 가능한 실험을 고르고 골라야 한다"고 전했다.
● 요동치는 국제정세로 과학계 '시름' 깊어져
신약을 개발하려면 약리학적 특성, 안정성, 용해성 등을 고려해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신뢰도가 높은 시약 공급사에 의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신뢰도 높은 시약사 상당수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있다. 영국 컨설팅사 아드리디안이 프랑스·우크라이나 공동연구팀과 함께 학술지 '드럭 디스커버리 투데이'에 2019년 10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신약 개발 회사의 80%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시약사에 의존한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곳이 '에나민(enamine)'이다. 국내 IBS 분자활성촉매연구단도 에나민에서 필요한 시약을 공급받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약 공급도 멈췄다. 연구단은 서둘러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 했다.
섬광 단결정 검출기 보급이 중단된 예미랩의 사정은 좀 더 난처했다. 검출기의 경우 미국 등지에서 대체품을 수입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소중호 IBS 지하실험연구단 책임기술원은 "검출기 종류마다 요구되는 기술 노하우나 설치 환경이 다른데, 미국은 자국 기술력에만 적합한 검출기를 생산하기 때문"이라며 "공급망 차질을 대비해 자체 기술을 개발했지만 아직 러시아의 기술력을 따라잡기는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2차전지와 반도체 연구·생산 역시 국가 간 무역 제재로 인한 재료 수급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리튬, 니켈, 흑연 등과 같은 리튬이온전지 핵심 소재의 중국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현진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2차전지 관련 국내 원자재 수입의 67~68%는 중국에 의존했다.
의존도가 높은 만큼 감수해야 할 위험도 크다. 지난 20일 발표된 흑연 수출 통제가 그 예다. 이 연구원은 "중국이 갑작스럽게 수출을 막을 경우 국내 연구·산업계는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 재료·원료 국산화 쉽지 않아...R&D 예산 삭감으로 재료비 감축 '이중고'
국내에서도 각종 원료와 실험 장치를 국산화하기 위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 수입산에 의존한다. 장지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고품질·고순도의 시료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오는 경향이 크다"며 "기초과학이 튼튼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싼 값을 불러도 재료를 사올 수 밖에 없게끔 오랫동안 쌓아온 노하우로 '대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것"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내년도 과학기술 R&D 예산이 대폭 감축되며 연구를 위한 재료 수급에 고충이 더해졌다. 세계적 메신저리보핵산(mRNA) 연구자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는 지난 6일 부산에서 열린 한국생물공학회 기자회견에서 그가 이끄는 기초과학연구원(IBS) RNA연구단의 일반 연구비 예산이 20% 삭감됐다고 전하며 "인력을 내보낼 순 없으니 재료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고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박건희 기자 wiss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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