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조 시인, 별이 된 한국 문단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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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에 든 한국 여성 시단의 최고 원로 시인
고인은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규슈여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잔상’을 발표하며 등단한 뒤 1953년 첫 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70년 넘게 활동했다. 문학 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지만, 시인에게는 시대가 스승이었고 그의 시는 시대적 산물이었다. 역사적 사건들이 시를 쓰도록 시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목숨> <사랑 초서> <바람 세례> <귀중한 오늘> <충만한 사랑> 등 19권의 시집과 11권의 수필집, 콩트집, 연구 논문 등 40여 권이 넘는 저서를 발표했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 ‘사랑의 시인’으로 불렸다. 기성세대는 물론 MZ세대도 국어 시간에 꼼꼼하게 분석하며 배웠던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미지의 새/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로 시작하는 ‘겨울 바다’, 가수 송창식의 노래 ‘그대 있음에’(같은 노랫말의 가곡도 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시 ‘편지’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이 많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인도의 시성 타고르 시집을 읽고 아름다우면서도 아픈 시의 세계에 매혹돼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를 지내며 신달자 시인 등 수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했으며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을 지냈다.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아 1993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8년 은관문화훈장, 2007년 만해대상, 2017년 정지용문학상, 2020년 구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남조 시인의 남편은 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작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김세중(1928~1986) 조각가. 대학을 졸업하고 마산에서 국어 교사를 하던 시절, 당시 같은 학교 미술 교사였던 김세중 조각가를 만나 결혼해 4남매를 두었다. 2015년 50억원의 사재를 털어 가족들과 60여 년간 살던 서울 효창동 자택을 열린 문화예술 공간인 ‘예술의 기쁨’으로 개관한 후 2017년 김세중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시인이 시를 쓰던 곳이자 남편 김세중 조각가의 작업실이기도 했던 의미 있는 공간을 예술인들을 위해 내준 것이다. 또 김세중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김세중 조각상과 김세중 청년조각상, 한국미술 저작·출판상을 시상해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을 겪고, 한국 근대화 과정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여성 문학인으로, 또 아내이자 네 자녀 아들 김녕(김세중미술관 관장), 석(디자이너), 범(설치미술가), 딸 정아(가천대 명예교수)의 어머니로 살아온 고인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생활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온 일상의 삶뿐만 아니라 문단의 인정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남성 문학인들 사이에서 여성 문학인으로 나설 사람이 없어 자신이 유일한 여성 시인이었던 셈이라고 했다. 고인은 아흔이 넘어 터득한 삶에 대한 겸허함을 담담하게 고백한 적이 있다. “90년을 넘게 산다는 건 엄청난 삶이다. 나이가 많다고 다 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나의 지난 삶에도 미숙한 점이 참으로 많다. 다른 이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성숙해진다. 사람이 뭘 좀 알고 할 줄 안다고 해서 성숙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은 넘치거나 부족해도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지난 10월 12일 진행된 고인의 영결식과 장례미사에는 유족과 동료 문인 12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은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의 조사로 시작됐다. 유자효 회장은 “선생님은 우리 문학의 큰 산맥이자 현대 시사의 증인이셨다”며 “시인들께는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분이셨다. 이제 저희는 어머니를 잃은 고아들이 됐다”라고 슬픔을 표했다. 이어 “생전에도 시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먹는 모습 보기를 좋아하셨는데, 마지막 주신 밥도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입관식에서 뵌 선생님은 평온한 얼굴이셔서 이미 천국에 드셨고 그리워하던 부군을 만났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직도 시를 구걸하고 시에 목마르다.
창작의 원동력은 절실함에서 오고,
그 절실함으로 인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다.
나는 문학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도 시대가 스승이었고,
역사적 사건들이 시를 쓰도록 내 마음을 움직였다”
-마지막 인터뷰에서(<우먼센스> 2023년 8월호)
문인들 “우린 어머니 잃은 고아들이 됐다”
대중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가족들이 기억하는 고인은 사랑이 많고 통찰력이 빛나는 유머러스한 어머니이자 손자, 손녀와 함께 차에서 음악을 들으며 나들이하는 것을 좋아하던 자애로운 할머니였다고 한다. 70년 넘게 시를 쓰고도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는 한평생 나를 이기기만 한다”며 창작에 대한 목마름을 고백했던 고 김남조 시인. 그의 간절함이 남긴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들은 영원히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것이다.
기획 : 하은정 기자 | 취재 : 박현구(프리랜서) | 사진 : 서울문화사 DB, 김세중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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