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병 안고 10㎞ 완주… 아이들은 강했다

춘천/이영빈 기자 2023. 10. 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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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춘천마라톤]
희소병인 당원병 환자들과 부모들이 29일 춘천마라톤 10㎞ 출발을 앞두고 강윤구(가운뎃줄 왼쪽에서 다섯째) 연세대 원주세브란스 교수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김지호 기자

몇몇 부모는 귀를 의심했다. 10km 마라톤이라니. 강윤구 연세대 원주세브란스 교수가 말했다.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아이들,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원병’은 10만명 중 1명꼴로 발생하는 희소병이다. 한국에 공식 등록된 환자는 약 250명. 보통 사람은 섭취한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저장해 뒀다가, 필요할 때 특정 효소를 이용해 글리코겐을 다시 포도당으로 전환해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당원병 환자에겐 이 효소가 없다. 전환을 못하니 섭취한 포도당을 다 쓰면 저혈당 쇼크가 온다. 그렇다고 필요 이상 포도당을 섭취하면 글리코겐이 쌓여 간이 망가진다. 보통 병원은 간 이식을 권한다. 당원병 환자 다섯 살 아들을 둔 배준호(41)씨는 “확진을 받고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죽을 병’이라고만 나오더라. 눈앞이 깜깜했다”고 했다.

강윤구(40) 교수는 전임의(펠로) 시절 우연히 행사에 참여해 당원병을 알았다. 2018년 미국에서 당원병 관리법을 배워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제작된 옥수수 100% 특수 전분을 하루 4번에서 최대 12번 자주 섭취시킨다. 글리코겐을 쌓지 않고도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강 교수는 원주로 몰려온 110여 명 환우를 전부 돌본다. 일반 진료 시간뿐 아니라 일대일 메신저로 본인 24시간을 총동원해 일상생활을 관리해준다. 강 교수는 “소명 의식 같은 거창한 건 없다.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며 웃었다.

이런 아이들에게 마라톤을 권유하니 부모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섯 살 아들을 둔 김은성(48) 당원병환우회장은 혈당 조절을 위해 새벽에 두세 번씩 아이를 깨워 옥수수 전분을 먹인다. 비몽사몽으로 전분을 먹는 아이를 보며 몰래 눈물을 훔친 날이 셀 수 없을 정도다. 김 회장은 “일반 아이들에 비해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체구도 작다. 마라톤은 꿈도 못 꿨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달랐다. 김준이(11)양은 “두렵긴 했지만 해보고 싶었다. 할 수 있다고 엄마 아빠를 졸랐다”고 했다. 부모들은 “힘들면 완주할 필요 없다. 참가에 의의를 두자”면서 어렵게 참가를 결심했다.

29일 오전 10시 서울, 충북 청주, 강원도 원주 등에서 당원병 환우들이 모였다. 아이 8명.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뛸 부모 12명이 함께 왔다. 이렇게 2023 춘천마라톤(조선일보사·스포츠조선·대한육상연맹 공동 주최) 10km 부문 출발선에 20명이 섰다. 12명 부모도 허리춤에 중간에 먹일 옥수수 전분을 넣은 약물병을 차고 있었다. 강 교수가 행렬 맨 마지막에서 따라갔다.

아이들은 아픈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신나게 뛰었다. 오히려 따르던 어머니 아버지들이 허둥지둥하며 따라가기 바빴다. 5km 반환 지점에서 아이 몇몇이 주저앉았다. 다른 아이들도 뒤처져서 걷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애가 탔다. 한 어머니는 “더 열심히 준비해서 다음 해에 도전할까” 물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뛰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6년생 이준호(가명)군은 “여기서 끝내면 아쉬워요. 끝까지 뛰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이군은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8명 중 첫째로 한 아이가 1시간 30분 31초 만에 완주를 마쳤다. 10km 어른 최고 기록(34분 16초)과 비교하자면 느리긴 하지만 이들에게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7명도 하나둘 결승선을 통과했다. 맏형 격인 김호수(17)군은 “이렇게 긴 거리를 뛴 건 처음이에요. 막상 해보니 어렵지 않았어요”라면서 환호했다. 노승현(11)군은 웃는 얼굴로 “진짜 뿌듯해요!”라고 소리쳤다.

출발한 지 2시간. 8명 중 마지막으로 이준호군이 들어왔다. “너무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라면서 완주 메달을 들고 그는 웃었다. 준호군 아버지는 “우리 아이도 뭐든 할 수 있어요. 우리 가족은 이제 걱정이 없는 집입니다”면서 활짝 웃었다. 이날 8명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강 교수도 위급 상황에서 이들에게 먹일 설탕물 등 비상 물품을 가슴에 차고 아이들을 뒤따랐다. 그는 “사실 걱정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소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방에만 누워있고 운동도 못 한다는 인식이 많다. 그런데 오늘 봐라. 엄청 잘 뛰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깨친 것만으로 오늘 이 경험은 앞으로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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