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세계 반도체 시장은 ‘지뢰밭’
람 이매뉴얼 주일(駐日) 미국 대사가 미국 웨스턴디지털(WD)과 일본 키옥시아 간 합병을 지지하기 위해 일본 정치인·경제 관료를 만난다는 말이 올여름쯤부터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여의도와 같은 정치 거리)에 파다했다.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미국 대사가 특정 기업 간 합병 전면에 나선 건 이례적이다. 이매뉴얼 대사는 합병법인의 경영권을 미국 회사가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관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가 움직이자, 일본 정부는 돈줄을 쥔 금융권을 옥죄었고 적자 기업 2곳이 합병하는데도 일본 3대 은행은 선뜻 1조9000억엔(약 17조2000억원)의 융자를 확약했다.
이달 초만 해도 WD·키옥시아 합병은 그렇게 미·일 경제 안보 강화라는 명분 속에 성사될 것 같았다. WD와 키옥시아가 합병하면 세계 낸드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누르고 단숨에 1위로 올라선다. 일본 반도체 부활의 시나리오가 현실감을 더하는 것이다. 일본 부활의 배경엔 같은 이해관계로 뭉친 미국과 대만이 있다. 미국에 맹방(盟邦) 일본의 부활은 중국 반도체 부상을 견제하는 카드다. 대만은 미·일 동맹에 협력해 중국의 무력 위협에서 안보를 지지받고자 한다. 대만 최대 반도체 기업 TSMC가 대만 정부와 협의하며 일본에 제1공장에 이어 곧바로 제2공장 건설도 추진하는 이유다.
WD·키옥시아 간 합병이 틀어진 건, SK하이닉스의 판단이었다. SK하이닉스는 2017년 경영 위기의 키옥시아에 4조원가량을 간접 투자했다. 당시 키옥시아 지분 약 60%를 매수한 컨소시엄에 돈을 낸 것이다. 금전적인 투자 이득도 별로 없는 데다 오히려 거대 경쟁자만 등장하는 합병을 찬성할 까닭이 없는 SK하이닉스가 반대 의향을 전달하자, 이번엔 일본 경제산업성이 등장했다.
급해진 일본 니시무라 경제산업상이 방문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회담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SK하이닉스를 설득하는 데) 한국 정부가 나서달라고 요청하려던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4년 전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했을 때 주무 부처가 일본 경제산업성이다.
SK하이닉스는 합병에 동의하지 않았고 중국 당국의 승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요인 등이 부각되며 이달 말 합병은 끝내 무산됐다. 석유 다음으로 중요한 안보 물자인 반도체를 차지하려는 글로벌 전쟁터에서 WD 옆엔 이매뉴얼 대사, 키옥시아 옆엔 니시무라 대신이 있었지만 SK는 외로웠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 키옥시아는 SK의 반대 의향을 뻔히 알면서도 밀어붙였고 니시무라 대신은 한국 산업부를 압박하려는 작전까지 짰던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안보라는 정치 논리가 뒤섞인 세계 반도체 시장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지뢰밭’ 같은 시장이 됐다. 한국 국민과 정치인들이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이란 자부심에 젖어있을 때 최전선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매일 살얼음판 같은 온갖 정치 변수 위를 걷고 있다. ‘한국 반도체’가 ‘국익’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 정치인과 국민도 더 늦기 전에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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