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민생’이 뭔지 알고나 현장 가나
빚내서 ‘영끌’ 하지 말고
“봉급 모아 내 집 마련” 증명하기
그게 지금 민생의 핵심이다
대통령이 “민생 현장에 가라”고 강력하게 주문한 뒤 용산 참모들이 일제히 민생 현장에 나설 것이라기에 기대했다. 김대기 비서실장이 첫걸음으로 비서실의 MZ 직원들과 간담회를 했다길래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민생 현장인가. 용산 직원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평소 현안마다 젊은 직원들 얘기 안 물어보고 밥도 안 먹고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 같았다. 그게 민생 행보인가. 이후로도 여기저기 갔다는데 아~ 하고 감동이 오는 곳이 없었다.
요즘 정부 여당은 입만 열면 민생이다. 위기 돌파의 만능 열쇠라고 믿는 것 같다. ‘정치 슬로건’도 ‘정책 아이디어’도 말끝마다 민생이다. 그래서 대통령 참모들, 장·차관들, 여당에 묻고 싶다. 무엇이 민생인가. 어디가 민생 현장인가. 구체적으로 서너 곳만 말해 달라.
민생 캠페인은 얼마 전 대통령이 “나부터 민생 현장을 파고들겠다” “참모들도 책상에만 앉아 있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의 여파였다. 여당의 길거리 현수막도 온통 ‘민생’으로 도배됐다. ‘국민의 뜻대로, 민생 속으로’ ‘겸허하게 민생 속으로’ 같은 것들이다. 뜻은 좋은데 조금은 막연했다.
민생 현장이란 전통시장, 택배 기사들의 일터, 낙후된 재개발 구역, 출퇴근 지옥철, 이런 곳일까. 서울 강남에 있는 빌딩을 청소하려고 매일 꼭두새벽 첫 버스를 타는 사람들, 달동네 좁은 골목을 1t 트럭으로 누비면서 “싱싱한 고등어가 왔어요”를 목이 쉬도록 외치는 사람들이 민생의 얼굴일까. 어떤 경제학자는 민생을 ‘서민층 삶을 보장하는 사회적 공공 복지’라고 했던데, 공공 근로의 일환으로 동네 천변에서 휴지 줍는 일이 민생 현장일까.
때로 민생은 진부하거나 편향돼 있을 수도 있다. 민생 행보가 정치적 성지순례라도 되는 양 왜곡될 때 생기는 현상이다. 기업도 소비 현장을 조사하고, 방송도 안방 시청률에 목숨을 건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 방송 시청률, 정권 지지율은 비슷한 성격인 것 같은데 정치인들은 ‘진짜 민생’의 현장을 찾는 데 젬병이다.
민생을 보살피려는 정부 에너지가 100이라면 그 절반인 50 이상을 무엇이 진정한 민생인지 찾아내는 데 써야 한다. 어디가 민생 현장인지 제대로 알아야 감동을 주는 대책이 나올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현수막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엊그제 한 동료가 “지금은 민생보다 고통 분담 구조 개혁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관료주의적 민생 정책’은 고작 전기료와 유류세 낮추는 것, 큰 틀에서 감세 정책 같은 것인데 “민생을 너무 강조하는 순간 경제는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고 했다. 홍두깨로 정수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민생이 ‘사탕발림’이라면 구조 개혁은 ‘몸에 좋은 쓴 약’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민생은 “공동체의 고통을 견디는 약자의 삶”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정치적 파괴력이 크다. 민생을 놓치면 지지율이 떨어지고, 지지를 잃으면 선거를 지고, 선거를 망치면 정권이 흔들리고, 그 결과 구조 개혁까지 요원해지는 역설적 인과관계가 정권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철 민생 구호가 포퓰리즘으로 흐르면 고장 난 축음기처럼 되풀이된다.
결국 민생은 상대적이고 우선순위다. 무엇이 먼저인가다. 한 지인이 말했다. “지금 민생은 ‘미래 세대’와 ‘주택’이다. 출산율과 국민연금까지 연동돼 있다. ‘봉급 모아 집 산다’는, 가난한 청춘들의 파괴된 인생 설계도를 되살려야 한다.” 오늘 ‘주택 예약 정부 적금’을 들면 10~20년 뒤 원하는 곳에, 지금 예상하는 가격으로 내 집을 갖게 된다는 것을 정권이 100% 보증하라고 했다.
민생은 희망이다. 빚내서 ‘영끌’하면 망하고, 성실하게 봉급 모으면 집이 생긴다는 것을 정권이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 2023~2024 민생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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