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의대 재도전 ‘보험’ 된 느낌”…증원 논의에 심란한 대학가
“난 열심히 다니는 학교인데
옆에선 의대 준비…좌절감”
최근 R&D 예산 대폭 삭감에
이공계열 사기는 더욱 꺾여
고려대 정경대학 2학년 A씨(20)는 최근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을 추진한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의대 입학 문이 넓어지면 의대 입시에 재도전하는 대학 재학생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A씨는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이 누군가에게 의대 진학에 실패할 것을 대비한 ‘보험’이라는 생각이 들어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A씨도 의대에 도전해볼까 고민도 했다. 그는 “의대에 진학하면 취업에 대한 압박감이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진로가 막막하고, 학점 취득이 어려울 때 의대에 진학하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서울 B대학 18학번 C씨(25)는 지난해 3월 의대 진학을 결심하고 휴학해 2년째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 C씨는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자퇴하고 의대에 가겠다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2025학년도 대입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대학 재학생도 흔들리고 있다.
의대 증원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시선은 이미 의대로 기울고 있다. 29일 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서울대 수시·정시 최초 합격자 중 1018명(10.3%)이 등록을 안 했다. 자연과학대(11.8%), 공과대(10.7%)뿐 아니라 의·약학계열에서도 미등록 비율이 높았다(치의학대학원 34.2%·간호대 26.8%·약학대학 20.2%). 이 중 상당수는 의대에 가기 위해 등록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수능에서는 서울대 합격생이 다른 학교 의대에 추가 합격해 등록을 포기하면서 처음으로 서울대 자연계열 정시 합격선이 연세대, 고려대보다 낮아졌다. 졸업 후 일자리가 보장된 대학 계약학과도 의대 열풍에 밀려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고려대, 서강대, 연세대, 한양대 반도체 계약학과 정시모집에서 합격 후 등록을 포기한 응시생은 모집인원의 1.5배를 넘는다.
정부가 연구·개발(R&D) 예산까지 삭감해 이공계열 학생들의 사기는 더 떨어졌다. 교육부의 내년도 이공계 R&D 사업 총예산은 3951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433억원(26.6%) 줄었다. 이공계열 처우 개선 없이 의대 정원을 늘리면 되레 의대쏠림을 더 심화시키는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고려대 물리학과에 다니는 양승진씨(24)는 29일 기자와 통화하며 “예산이 삭감된다는 예고로 박사후연구원(포닥) 자리가 하나씩 없어지는 게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며 “이공계열, 특히 기초연구는 가뜩이나 보장된 게 없는데 언제라도 정권이나 정책 변화 하나로 흔들릴 수 있는 분야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는 최소한으로 면허가 보장돼 있는데 이공계는 당장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으니, 이공계에 온 학생들은 의욕이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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