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광장에서…눈물 흘리며 “진상규명” 외친 시민들
이태원 골목엔 전국서 추모객 모여 희생자 159명 추모
참석자들 “왜 책임자는 한 명도 처벌 안 됐나” 입 모아
“대통령님, 저희는 유가족입니다. 정치집회가 아니라 시민과 함께하는 추모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아들딸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태원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지 1년이 됐습니다. 오늘만큼은 온전히 희생자를 추모하고 애도하고자 합니다. 159명의 영정 앞에서 진정으로 눈물 흘리고, 진정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겠습니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은 29일, 트럭 위에 올라선 유형우씨(53·고 유연주씨 아버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생자 유가족 등이 이룬 행진 대열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 잠시 멈춰 섰을 때였다. 이날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1년 전 참사가 발생했던 골목 인근에서 용산 대통령실을 거쳐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했다. 보라색 점퍼를 입은 유족들은 “특별법을 제정하라” “안전사회 건설하라” “대통령은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3·4차선 차도를 메운 행렬이 400m 이상 이어졌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 분향소 옆 연단에 선 이정민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고 이주영씨 아버지)은 “159명이 별이 돼 사라진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집 안 곳곳에 남은 가족들의 체취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아픔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하늘의 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답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이 조금씩 모인다면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고 더는 유가족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 우리에게는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만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1년 전 참사 현장인 용산구 해밀톤호텔 골목에는 전국에서 추모객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 이름 붙은 이곳에서 추모객들은 참사가 발생했던 골목을 한참 응시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포스트잇 수백장이 붙은 벽 앞에서 소리 내 우는 이들도 많았다. ‘추모의 벽’ 앞에는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두고 간 과자와 초콜릿, 통조림, 술 등이 국화꽃 사이사이에 빼곡히 놓여 있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아들·손녀와 함께 왔다는 김정희씨(71)는 추모의 벽 앞에 서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는 “마음이 쓰여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왔다”고 했다. 그는 “이태원 근처에 와본 것은 몇십년 만”이라며 “손녀에게도 (이태원 참사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 같이 왔는데 어린애가 어떻게 알겠나”라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왔다는 고교 1학년 오세린양(16)도 “처음 참사가 발생한 직후에는 이곳에 놀러 오는 사람들이 문제인 줄 알았다”면서 “시간이 흐르고 정확히 알아갈수록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는 외국인들도 다수 사망한 것에 대해 “나도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중에 해외에 가서 축제를 즐기다 이런 참사를 당하면 얼마나 슬프겠나”라고 했다.
추모 현장에 모인 시민들은 참사 이후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은 데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온 이모씨(75)는 “사고 직후 매일 녹사평 분향소에 왔는데 한동안 못 오다가 미안한 마음에 1주기를 맞아 다시 오게 됐다”면서 “그렇게 큰 참사가 발생했는데 최소한 행정안전부 장관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유가족들이 제발 마음을 잘 잡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오래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충남 아산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정모씨(71)도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일어났는데 책임자는 단 한 명도 처벌이 안 됐다. 장관 아들이 죽었어도 이랬을까”라고 했다.
행진 시작 직전 오후 1시59분부터는 4대 종단 관계자들이 원불교, 개신교, 불교, 천주교 순으로 나와 기도와 독경을 하는 등 희생자 159명의 넋을 위로했다. 기도가 시작되자 일대는 순간 고요해졌다.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멈춰 서 있지 마세요” 등 1년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안전요원의 외침과 경찰의 호루라기 소리가 참사 현장을 가득 메웠다.
강은·배시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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