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민생으로 돌아가라?

기자 2023. 10. 29.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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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세 개의 아이스크림 가게가 같은 간격을 두고 양쪽 끝과 한가운데에 일렬로 늘어서 있다.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똑같은 밀도로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면, 가운데 가게가 가까운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결국 아이스크림 가게들도 더 많은 손님을 찾아 해변의 중앙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른바 중위투표자 정리의 알기 쉬운 강의용 버전이다.

이 정리가 과연 현실에서 들어맞는가 아닌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그 함의만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된다. 집토끼니 집 나간 토끼니 하는 따위의 비유도 그와 관련이 있다. 중위투표자 정리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정치세력이 하나의 스펙트럼 속에서 줄 세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북한에 대한 태도라는 문제가 들어오면 서구적 의미의 진보와 보수 구분은 흐트러진다. 세대별로 생각하는 주요 모순도 확연히 다르다. 2030세대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거나 “조국은 하나다”라는 감성은 “공산전체주의”만큼이나 낯선 것이다.

모든 추상적 이론이 그러하듯 중위투표자 정리 또한 생생한 구체적 현실 앞에서는 힘을 잃거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뜬금없이 이념 문제를 강조하거나 모든 것을 전 정부 탓으로 돌리는 태도도, 설사 그것이 정교한 기획의 산물은 아니더라도,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정치세력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늘어세운 뒤 스스로에게 유리한 지형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전 정권 실적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이라는 양자택일적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요컨대 해변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딱 둘만 남겨놓음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게로 오도록 만든다면 그 나름대로 합리적인 전략이 되는 것이다. 미국-일본이냐 중국-북한이냐라는 어느 정도는 현실에 기초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허구적인 양자택일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정치적 논쟁들이 이해될 법도 하다(실은 이렇게라도 이해해보려는 나 자신의 노력이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선거가 다가올수록 중간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민생”이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이 키워드는 무한복제된다. “여야 정치권은 민생 회복에 전념해야”(신문 사설), “이념논쟁보다 민생에 집중해야”(대통령), “기득권 내려놓고 민생중심 개혁정치로 거듭나야”(야당 정치인) 등등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민생현장으로 가라”고 외쳐댄다.

대저 민생이란 무엇일까? 실은 그 연세의 일반인들조차 잘하지 않을 시장통에서 어묵 먹기? 민생을 빙자한 지역유지들의 민원 들어주기? 사실 경제문제로만 국한하더라도 성장률 논쟁, 세수 펑크 논쟁 등등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문제가 널려 있다. 그중에는 끝장 논쟁을 통해 적어도 민주공화국 시민들에게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이 밝혀져야 하는 가짜 문제들도 있다. 민생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들을 잊고 지나치게 해주는 마법의 키워드가 아닐까? 실체도 잡히지 않는 민생 논란을 벌이며 표를 얻는 경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진정 논의되어야 할 주제들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고 나면, 다시금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이데올로기 공격만이 난무할 것이다. 결국 수많은 말들이 어지러이 떠돈 기억,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입맛에 맞는 입장만 편집하여 남길 것이고, 그 희미한 기억에 의존하여 다시 몇년 뒤에 새로운 투표장으로 향할 것이다.

정치적 행위가 상징을 그 본질로 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상징의 배후에 놓인 본질을 향해 한 걸음씩이라도 다가갈 때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민생이 그저 상징, 심하게는 상징조작으로만 존재할 때, 민주주의의 위기는 반복될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바나나농장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학살당하지만, 목격자인 등장인물 자신도 스스로의 기억을 의심할 지경으로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아무도 그 학살에 관해 얘기하지 않음으로써 부인한다.

민생이라는 개념을 그저 상징으로만 활용하며, 그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인정하거나 적당히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할 때, 우리는 때로 눈앞에서 벌어졌던 일조차도 잊어버리고 더 이상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니 “민생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어쩌면 자주, 그 잊힘 속에서 이익을 취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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