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기적은 여기서부터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문제’라 하고 어느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라 한다. 결국 문제든 희망이든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오늘 낮에 부산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가 산밭에 떨어진 밤을 줍다가 이렇게 말했다. “엄마, 신발 밑에 더러운 흙이 묻었어요.” 한 해 가운데 가장 바쁜 가을걷이 때라, 산길마다 논밭에서 나온 농기계가 떨어뜨리고 간 흙덩이가 수두룩하다. 그 흙이 도시 아이 눈에는 목숨을 살리는 흙이 아니라 그저 더러운 흙으로 보였을까?
농부들은 흙에서 산다. 흙을 닮아 살갗도 흙빛이다. 농부들은 논밭에서든 마을길에서든 만나기만 하면 ‘살리는 이야기’만 한다. “자네 밭에 김장배추와 무는 우찌 그리 잘 자라는가?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가?” “내년엔 다랑논에 벼농사 안 짓고 콩 심을 거라며? 흙이 좋아 콩농사도 잘될 걸세.” 내가 도시에서 살 때는 무얼 살리는 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편히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늘어놓았다.
아무튼 참 농부들은 돈부터 셈하고 농사짓지 않는다. 그저 자연 순리대로 때가 되면 씨앗을 뿌리고 거두며 살아갈 뿐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농부를 귀한 눈으로 보아주는 분들이 있어 사는 맛이 난다. 지난달 경향신문 9월25일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다’를 읽고 합천 가회 산골 마을을 찾아준 경향신문 독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수원에서 대구에서 경주에서 김해에서 부산에서 서산에서 진주에서 산청에서 참으로 많은 분이 와 주셨다.
그날 청년 농부들이 ‘시시숲밭 콘서트’를 시작하기 전에 ‘상생 경매’를 열었다. 상생 경매는 돈 많은 사람한테 물건을 파는 경매가 아니다. 뜻있는 분들이 기부한 물건을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돈 받지 않고 그냥 건네주는 경매다. 아무런 조건 없이 상생 경매에 기부한 자연산 송이버섯, 한살림 홍삼, 생강 유과, 텀블러, 그릇, 옷, 모자, 가방, 책….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렇게 산골 농부들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시다니! 그 덕분에 참여한 분들이 평생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날,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적’이 수없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하나는 ‘까치밥(기부한 돈)’이다. 큰 알림판에 만원, 오천원, 천원짜리 돈을 자석으로 붙여두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돈을 떼어서 갖고 싶은 물건이나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그 돈을 떼어 우리밀 빵과 감자전을 사 먹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붙여둔 까치밥보다 더 많은 까치밥이 그 자리에 붙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까치밥을 떼어 가지 않고 오히려 까치밥을 붙이고 있었다. 슬그머니 다가가서 물었다. “까치밥으로 먹고 싶은 걸 사 먹어도 되잖아. 그런데 왜 까치밥을 붙이고 있지?” 그 아이는 가을하늘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제 돈을 다른 사람이 써주면 기분이 좋아질 거 같았어요. 그래서 붙였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람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희망이다!
서정홍 산골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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