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호박이 산후 부기를 빼지는 않는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즈음은 유난히 먹거리가 풍성할 때다. 흔히 ‘늙은호박’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무렵의 제철 음식 중 하나다. 늙은호박은 둥글넓적한 모양이 맷돌을 닮았다고 해서 ‘맷돌호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늙은호박’과 ‘맷돌호박’은 호박의 상태나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고, “늙어서 겉이 굳고 씨가 잘 여문 호박”을 뜻하는 표준어는 ‘청둥호박’이다.
이런 청둥호박은 산모에게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동의보감>에 ‘산후에 호박을 우린 물을 마시면 나쁜 피를 제거하고 체내 기운을 순환해 여러 증상을 예방한다’는 설명이 있다”며 호박을 산후조리에 좋은 음식으로 권하는 글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글들은 여러 모순을 담고 있다. 우선 채소 호박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임진왜란 이후다. 하지만 동의보감은 그 이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동의보감>을 엮은 허준 선생은 평생 호박을 구경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더욱이 <동의보감>은 한자로 쓰인 의학서인데, 호박의 ‘박’은 순우리말이다. 채소 호박을 뜻하는 한자는 ‘남과(南瓜)’다. 즉 <동의보감>에 ‘청둥호박’이 실리려면 ‘남과’로 표기돼야 한다. 그러나 <동의보감>에는 남과에 대한 얘기가 없다. 대신 <동의보감>에 한자어 ‘호박’이 나온다. 이때의 호박은 “나무의 진 따위가 땅속에 묻혀서 탄소·수소·산소 따위와 화합해 굳어진 누런색 광물”을 뜻하는 ‘琥珀’이다. 보석 대접을 받는 그 광물이다.
결국 “아기를 낳은 후 청둥호박을 고아 그 물을 마시면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데 좋다”는 속설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상술이 만들어 낸 얘기다. 물론 채소 호박은 녹말 함량이 많아 칼로리가 높고 이뇨작용에 좋은 성분도 함유해 좋은 먹거리다. 다만 명나라 때의 약학서 <본초강목>에 “남과를 너무 많이 먹으면 습한 기운이 체내에 쌓여 기의 순환을 방해하거나 소화장애를 일으킨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땀을 많이 흘리고 살이 잘 찌는 산모는 호박을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한의사들도 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추석 의료 대란 없었던 이유…“응급실 의사 70%, 12시간 이상 연속 근무”
- ‘윤 대통령 부부 공천 개입 의혹’ 김영선, 당선 후 명태균에 6300만원 건넨 정황
- ‘황재균♥’ 지연, 이혼설 속 결혼 반지 빼고 유튜브 복귀
- 9급 공채, 직무 역량 더 중요해진다···동점 시 전문과목 고득점자 합격
- ‘퇴실 당하자 홧김에…’ 투숙객 3명 사망 여관 화재 피의자에 영장 신청 예정
- 일론 머스크 말처럼…사격 스타 김예지, 진짜 ‘킬러’로 뜬다
- 타자만 하는 오타니는 이렇게 무섭다…ML 최초 50-50 새역사 주인공
- 혁신당, 윤 대통령 부부 공천 개입 의혹에 “대통령실 왜 아무 말 없냐”
- 당기면 쭉쭉, 보이는 건 그대로…카이스트가 만든 ‘꿈의 디스플레이’
- ‘삐삐 폭발’ 헤즈볼라 수장, 이스라엘에 보복 선언 “레드라인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