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호박이 산후 부기를 빼지는 않는다

엄민용 기자 2023. 10. 29. 20: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즈음은 유난히 먹거리가 풍성할 때다. 흔히 ‘늙은호박’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무렵의 제철 음식 중 하나다. 늙은호박은 둥글넓적한 모양이 맷돌을 닮았다고 해서 ‘맷돌호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늙은호박’과 ‘맷돌호박’은 호박의 상태나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고, “늙어서 겉이 굳고 씨가 잘 여문 호박”을 뜻하는 표준어는 ‘청둥호박’이다.

이런 청둥호박은 산모에게 좋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동의보감>에 ‘산후에 호박을 우린 물을 마시면 나쁜 피를 제거하고 체내 기운을 순환해 여러 증상을 예방한다’는 설명이 있다”며 호박을 산후조리에 좋은 음식으로 권하는 글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글들은 여러 모순을 담고 있다. 우선 채소 호박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는 임진왜란 이후다. 하지만 동의보감은 그 이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동의보감>을 엮은 허준 선생은 평생 호박을 구경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더욱이 <동의보감>은 한자로 쓰인 의학서인데, 호박의 ‘박’은 순우리말이다. 채소 호박을 뜻하는 한자는 ‘남과(南瓜)’다. 즉 <동의보감>에 ‘청둥호박’이 실리려면 ‘남과’로 표기돼야 한다. 그러나 <동의보감>에는 남과에 대한 얘기가 없다. 대신 <동의보감>에 한자어 ‘호박’이 나온다. 이때의 호박은 “나무의 진 따위가 땅속에 묻혀서 탄소·수소·산소 따위와 화합해 굳어진 누런색 광물”을 뜻하는 ‘琥珀’이다. 보석 대접을 받는 그 광물이다.

결국 “아기를 낳은 후 청둥호박을 고아 그 물을 마시면 산후 부기를 제거하는 데 좋다”는 속설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상술이 만들어 낸 얘기다. 물론 채소 호박은 녹말 함량이 많아 칼로리가 높고 이뇨작용에 좋은 성분도 함유해 좋은 먹거리다. 다만 명나라 때의 약학서 <본초강목>에 “남과를 너무 많이 먹으면 습한 기운이 체내에 쌓여 기의 순환을 방해하거나 소화장애를 일으킨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땀을 많이 흘리고 살이 잘 찌는 산모는 호박을 많이 먹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한의사들도 있다.

엄민용 기자 margeul@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